‘감자’ 대신 채 썬 당근에 전분 2큰술, 카레가루 1큰술, 약간의 소금을 넣고 바삭하게 부친 ‘당근 뢰스티’는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도 반할 맛이었다. 에어프라이어로 15분 만에 간단하게 만드는 ‘토마토 무수분 수프’ 역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강타했다. ‘제리코 레시피’ 백지혜 요리연구가는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재료로 그들이 가진 풍미를 한껏 끌어올리는 일명 ‘풍미 마스터’다. 그의 가방 속에도 풍미 노하우가 숨어 있을까?
밀키트 시대… 쿠킹클래스가 필요한 이유?
2015년 백 요리연구가는 숙박 공유 플랫폼 에어비앤비 측 제안으로 외국인 관광객 대상 비건 한식 쿠킹클래스를 시작했다. 영국 유학 시절 친구들을 초대해 한식을 만들어주던 취미가 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요리를 전공으로 공부한 적은 없어요. 그저 혼자 해외 생활을 하며 장을 봐서 외국인 친구들에게 집밥을 해주는 경험이 쌓였을 뿐이죠. 한식이 낯선 외국인 친구에게는 해물파전과 잡채만 해주면 끝이거든요. 음식을 자연스럽게 나눠 먹으며 느끼는 기쁨이 굉장해요. 그런 시간을 다시 살리고 싶어 쿠킹클래스를 시작했어요.”
클래스 한 번으로 그 요리에 능숙해질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완성도 높은 음식을 직접 맛보는 데 있다. 각종 온라인 플랫폼에는 다양한 영상 레시피가 넘쳐난다. 그러나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은 그 완성도를 알지 못한다.
“쿠킹클래스는 요리를 배우는 시간이라기보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요리의 맛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는 시간이에요. 그렇게 집에 돌아가서 직접 음식을 해보고 ‘맛이 다르다’ ‘그럼 뭐가 달라진 걸까’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손쉽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대기업의 맛’, 밀키트와 배달음식의 시대이기도 하다. 백 요리연구가는 간편식이 넘쳐날수록 나 자신을 잘 먹이기 위해 손을 걷어붙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반문한다.
“남이 아닌 나 스스로 잘 먹고 기운 내고 싶을 때, 혹은 친구에게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요? 간편식이 줄 수 없는 2%를 채워주는 식자재와 손맛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제 쿠킹클래스에 오시는 분들께 방문 이유를 물어보면 ‘나에게 보상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 온다’고 답하는 분이 많아요. 그게 답인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그의 요리는 누구든 집에 돌아가서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레시피여야 맞다. 무, 당근, 토마토, 배추, 버섯, 대파 등 쿠킹클래스의 메인 식재료는 여느 집 냉장고 속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흔한 재료의 맛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풍미 요리의 노하우다.
그는 마트에서 1000원대(300g)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느타리버섯을 예로 들었다. 풍미 가득한 한 끼 ‘느타리버섯 유린기’를 만드는 법은 이렇다.
“버섯을 프라이팬에 구우면 물이 엄청 나와요. 물컹하고 맛이 별로 없죠. 느타리버섯을 최상으로 맛있게 먹을 방법은 수분을 싹 날려서 바삭하게 굽는 거예요. 느타리버섯을 한 팩 사서 밑동을 자른 뒤 올리브유, 소금, 후추를 뿌려 에어프라이어 180도에 20분 돌리면 아주 맛있게 익어서 나와요. 그리고 식초와 간장을 2:1 비율로 넣고 설탕과 물로 맛을 조절해서 소스를 만드세요. 그 소스에 다진 양파와 파프리카 정도 썰어서 위에 뿌리기만 하면 쫄깃쫄깃 고기 식감의 느타리버섯 유린기가 됩니다.”
요리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은 도리어 장점이 됐다. 그의 레시피는 재료 선택이나 요리 방식이 자유롭다는 얘기를 듣는다.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레시피를 구상하고, 재료를 조합해 만들었는데 제가 상상했던 맛과 일치할 때 기분이 좋더라고요. 파인다이닝 셰프의 영역이 있다면 저 같은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백 요리연구가의 풍미 노하우를 녹여낸 레시피 책 <파스타 마스터 클래스> <채소 마스터 클래스>는 각각 1만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근 ‘마스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풍미 마스터 클래스>를 발간했다.
백지혜 요리연구가의 가방 속에는…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귀여운 당근 인형이 달린 키링이다. 그의 히트작 당근 뢰스티를 기념해 지인이 선물했다. 저서 <채소 마스터 클래스>에 실린 당근 뢰스티는 SNS를 통해 인증샷이 이어지고 유명 유튜버들이 따라 하면서 유행이 된 그의 오리지널 레시피다. 뢰스티는 감자전과 비슷한 스위스 전통 음식이다.
“당근 뢰스티는 책을 내기 전 쿠킹클래스에서부터 반응이 좋았어요. 당근이 익으면 군고구마 맛이 난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었죠. 채소 요리는 건강한 음식이지만 ‘맛이 없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맛있는 채소 요리를 보여주자는 신념으로 만든 레시피예요.”
물 마를 날이 없는 그의 손에는 핸드크림이 필수다. 애용하는 핸드크림은 ‘워킹 핸즈’. 그야말로 일하는 사람을 위한 보습 기능이 강한 제품으로 향이 없어 요리사들이 들고 다니는 크림으로 유명하단다.
최근에는 새로 출간한 책을 만나는 사람에게 소개하기 위해 한 권씩 가방에 넣고 다닌다. 신간과 함께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가 직접 만든 ‘풍미 파우더’다. 마라탕에 넣는 사천후추 화자오, 참깨, 흑후추, 소금, 설탕 등으로 배합되어 달고, 시고, 짜고, 쓰고, 매운 직관적인 맛들이 어우러진다. 고기구이, 두부구이, 삶은 달걀과 어울리고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 위에 뿌리거나 과자에 뿌려 먹어도 맛있다.
한동안 요리계를 풍미할 것 같은 용어 풍미(風味). 사전에서는 ‘음식의 고상한 맛’이라 정의하는 풍미란 과연 무엇일까?
“풍미란 한 단어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맛이죠. 저는 제철을 맞아 잘 후숙된 대봉시, 딱 알맞게 익은 김치, 잘 숙성된 치즈 같은 재료의 꽉 찬 맛이라고 생각해요. 양념과 향을 적절하게 더하면 그 어떤 식재료도 풍미를 낼 수 있죠. 지금 자리에서 ‘끙차!’ 하고 일어나서 우리 집 냉장고 문을 열면 셰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풍미 가득한 요리를 만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