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는 고유한 감각 ‘느좋’

정유라 외부기고자
[언어의 업데이트]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는 고유한 감각 ‘느좋’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해 내가 무엇을 사랑하며 보냈는지 궁금해 소셜미디어에 남겨둔 하트들을 살펴본다. 김태리 배우, 육아 꿀팁, 예능 콘텐츠, 빈티지 유리 조명…. 그런 것들에 다 하트가 묻어 있다. 하트를 누르는 기준을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느낌이 좋았다. ‘느낌이 좋다’. 줄여서 ‘느좋’은 올해 들어 유독 많이 보이는 신조어다. ‘지금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 완전 느좋’ ‘무신사에서 느좋패딩 발견’과 같은 맥락으로 ‘느좋’의 순간과 대상들을 공유한다. 텍스트 기반의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에서도 ‘느좋’의 언급량이 ‘추구미’ 언급량을 역전했다. 내년을 전망하는 여러 트렌드에서 잘파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로 꼽은 ‘추구미’보다 ‘느좋’이 더 많이 유통 중이다.

줄임말이 한글을 파괴하고 세대 간 소통을 단절시킨다는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줄여 쓴다는 건 자주 쓴다는 뜻이고, 자주 쓴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신조어에 열린 태도를 지녔다 자부하는 나조차도 ‘느좋’은 무척 생경했다. 도대체 왜 ‘느낌’인지 궁금했다.

처음엔 정서가 아닌 느낌만 좇는 피상적이고 가벼운 시대의 초상일지 모른다는 편견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다가 무심코 누른 납작한 하트 정도의 존재감, 딱 그 정도의 얄팍함일 거라는 오해는 다행히도 사람들이 남겨둔 ‘느좋’의 순간들을 찬찬히 읽으며 보기 좋게 사라졌다.

‘겨울 아침 햇빛의 따뜻한 온기. 아무도 밟지 않은 갓 내린 눈을 처음 밟았을 때 폭신한 감촉. 하얀 하늘 위로 날아가는 철새들의 움직임’, 여기까지는 ‘느좋’ 대신 아름다움이나 기쁨을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많은 ‘느좋’의 순간들을 탐구하다 보면 왜 이 시대에 다름 아닌 ‘느낌’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할머니 집 화장실에 있을 것 같은 낡은 바가지, 오래된 아파트 1층의 녹슨 우편함에 꽂힌 편지들, 사은품으로 받았지만 어쩐지 손에 익어 자꾸 쓰게 되는 이상한 캐릭터의 머그컵’과 같은 순간과 장면에 ‘느좋’이 함께 붙는다. 이 느낌들은 ‘행복하다’나 ‘힙하다’처럼 기존에 합의된 긍정 표현으로 분류할 수 없는 신선한 감각이다. ‘느좋’은 오직 내게만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들을 말하기 위한 언어다.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어떤 사회적 합의도 전제로 하지 않고 나만 좋은 것들을 표현하는 언어다.

남들에게 미리 정의된 적 없던, 긍·부정으로 분류된 적 없던 날것의 감각들이 세상에 더 많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느낌은 세계와 내가 만나 일으키는 가장 최초의 화학작용. 내게 끼얹어지는 날것의 느낌들은 오로지 나여야만 탄생 가능한 고유함이다. 우리를 스쳐가는 무수한 자극 중 내가 직접 느끼는 것들을 ‘느좋’이란 말과 함께 세상에 남기는 작은 권리는 우리를 세계와 더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해가 갈수록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느낌을 발견하는 게 어려워진다. 그건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게 어려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깊고 선명하게 나를 건드리는 느낌들을 만난다면, 그 소중한 느낌들만큼은 ‘느좋’이라는 말에 가두지 않고 나만의 언어로 풀어 세상에 내놓고 싶다. 스쳐갈 뻔한 느낌이 사랑으로 번져 싱싱한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는 고유한 감각 ‘느좋’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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