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한 지난 4일 새벽 군 병력이 국회에서 철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사태로 원화 가치 변동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이 환율 움직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강달러 흐름이 나타나던 와중에, 국내 정치에서도 돌발 변수가 불거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1430원대를 넘보고 있다. 달러로 돈을 빌린 기업은 물론 해외 투자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기업들의 부담도 덩달아 늘고 있다.
8일 산업계에 따르면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3% 가까이 급등해 1440원을 기록했다. 환율은 금융당국의 유동성 공급 계획이 나오면서 다소 가라앉았으나 지난 7일 기준 1420원을 돌파하며 다시 상승세에 접어든 모습이다.
수출 기업으로선 환율 상승은 단기적으로 호재다. 상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져 판매 증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5% 오르면 회사의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은 4187억원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악재다. 원자재 값이 오르는 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동성 때문에 투자 결정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해외 설비투자를 앞둔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약 24조원)를, SK하이닉스는 38억7000만달러(약 5조4700억원)를 미국 공장 설립에 투자할 예정이다.
전기자동차 ‘붐’을 예상하고 미국 등 곳곳에 대규모 투자를 해온 배터리 업계도 비상등이 켜졌다. LG에너지솔루션의 3분기 기준 달러부채는 6조8284억원으로, 3개월 전의 4조1607억원보다 2조6000억원가량 늘었다. 달러부채가 달러자산(4조4396억원)보다 많으므로 환율이 오르면 회계상 손실을 본다. 이 회사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환율이 10% 상승할 때 예상 세전손실은 2388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말 예상치(257억원)에 비해 10배 가까이 커졌다. 리튬·니켈 등 원자재를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기업의 달러빚 부담도 가중된다. 수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주로 외화채를 찍어 조달해온 SK온 또한 금융비용이 커질 수 있다. 항공기 등을 구매·리스할 때 달러로 지출하는 대한항공의 순외화부채도 지난해 약 27억달러에서 올해 3분기엔 33억달러로 늘어난 상황이다. ‘컨트리 리스크(국가 위험도)’가 높아질수록 국내 기업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지불해야 하는 가산금리 부담은 늘어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환율 변동폭이 커지면서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이 쉽지가 않다”고 전했다. 이처럼 계엄 사태 이후 이어지는 정치적 불확실성은 내년 계획을 준비하는 기업들의 주요 의제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이달 중순 글로벌 전략회의를 연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조만간 해외 권역본부장회의를 열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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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환경을 두고 재계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인 2016년 하반기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부터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까지 3개월간 원달러 환율은 100원 가까운 변동폭을 보였다. 당시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던 점도 지금과 비슷하다.
반면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파국에 접어들었던 박근혜 정부와, 갑작스럽게 계엄령을 내린 윤 대통령이 초래한 불확실성은 그 수준이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2차, 3차 탄핵소추안 발의가 반복될 것인 만큼 시장 참여자들의 ‘물음표’가 상당히 커진 상태”라며 “불확실성이 장기화될수록 원화 가치의 급락이 오고 경기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