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외교’ 추구한다더니 ‘비상계엄’
국제사회에서 한국 입지 축소 우려
미국, 한국에 불편한 심기 우회적 표현
트럼프 행정부 출범 앞두고 리스크 키워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진행된 지난 7일 서울 여의도에서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내란죄 윤석열 탄핵’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로 국제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신뢰도 추락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그간 자유와 민주주의 등 가치에 기반한 외교를 표방했지만 비상계엄 선포로 이같은 가치와 외교기조를 크게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사회가 한국 외교정책의 신뢰성 및 지속성에 의구심을 갖게 되면서 상당한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자유·인권·법치·민주주의 등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와 연대한다는 ‘가치 외교’를 전면에 내세웠다. 세계의 자유·평화·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 실현이라는 비전도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월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폐회사에서는 “세계 도처에 여전히 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가 고개를 들고 민주주의 가치와 정신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라며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여정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됐다. 윤 대통령은 국회 활동을 전면 봉쇄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실제 국회에 계엄군을 투입해 계엄해제 요구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려 했다. 계엄 명분을 쌓기 위해 북한과의 국지전을 일으키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권위주의와 빈지성주의가 고개를 들고 민주주의 가치와 정신을 위협한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윤 대통령이 그간 외교 기조와 정반대 행태를 보이면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12·3 비상계엄 사태는 그간 한국이 쌓아온 소프트파워와 윤 대통령 스스로 그렇게 강조한 자유와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부정했다”라며 “앞으로 세계 어느 국가가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믿고, 외교·안보 정책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고 신뢰하겠나”라고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가 8일 대국민 공동 담화에서 각각 “윤 대통령은 외교를 포함한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방과의 신뢰를 유지하는 데 전 내각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것도 국제적 신뢰도 하락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일한 동맹인 미국에서도 이례적으로 윤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4일(현지시간) 공개석상에서 계엄 선포를 두고 “윤 대통령의 심한 오판”, “매우 불법적”이라고 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깊은 우려”를 표명했고, 브래드 셔먼 미 연방 하원의원은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한 전 세계의 노력에 대한 모욕”이라고 밝혔다. 특히 전날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무산된 것과 관련해 바이든 행정부 당국자가 이날 “한국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헌법에 따라 온전하고 제대로 작동할 것을 계속해서 촉구(한다)”고 언급한 점도 주목된다. 미국이 탄핵소추안 무산에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내비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국내 정치력을 상실한 데다 국제적인 신뢰도 잃으면서 당분간 정상적인 외교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애초 다음달 초쯤 방한하는 일정을 조율했지만,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중단됐다고 전날 일본 언론은 전했다. 지난 4일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도 방한을 하루 앞둔 시점에 일정을 전격 취소했다. 미국 국방부 장관과 일본 방위상이 방한 계획을 취소하는 등 다른 고위급 외교 일정도 차질을 빚고 있다.
이런 외교 공백은 내년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출범과 맞물려 우려를 키우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대폭 인상 등 한국에 공세적인 입장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세우기 전 한국의 입장을 반영시기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필요하다. 트럼프 당선인이 정상 간 개인적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에 비춰, 한·미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 필요성도 거론돼왔다. 계엄 사태로 정부가 트럼프 당선인 측 인사들과 접촉면을 늘리려는 시도도 중단됐을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정치가 안정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응책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