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아궁이 땔감을 하면서 문득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먹고 네 어미랑 같이 보건소에 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아비와 어미도 어느덧 예순 중반을 훌쩍 넘었으니, 지금 떠난다 해도 서운하거나 아쉬울 게 없다. 그러니까 갑자기 아비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119도 부르지 말기 바란다. 그냥 아비가 살던 집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기 바란다. 그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 생각한다.
아비는 ‘장기와 조직 기증 희망자 등록신청서’까지 적어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반대하지 말고 받아들이기 바란다. 아비가 죽어서, 죽어가는 사람 아홉 명을 살릴 수 있다는데…. 아픈 사람 100명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는데…. 그걸 알면서 어찌 그냥 떠날 수 있으랴. 허물 많은 아비가 마지막 떠나는 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살아가다 가끔 못난 아비가 원망스러울 때가 찾아올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비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아비가 되었으니, 얼마나 서툴고 모자랐겠나. 아비가 어리석은 탓으로 일어난 일이니 온 마음을 다해 용서를 빈다. ‘용서는 뼈아픈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와 같다고 하지. 그러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기 바란다.
어느 날, 아비가 끝내 숨을 거두고 나면 고달픈 삶에 지쳐 늙고 병든 몸뚱이지만 필요한 분들께 나누어주고 불에 태워주기 바란다. 뼛가루는 아비가 좋아하던 낮은 언덕 아래, 감자밭 어디쯤 깊이 파묻어주면 좋겠구나. 해마다 오월이 오면 아비는 그곳 어디쯤 하얀 감자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그러니까 아비 이름이 적힌 비석이나 푯말 따위도 세우지 말고, 아비 이름으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 날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다 내려놓고 새털처럼 가볍게 떠날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아비는 1996년(38세)부터 농촌과 도시가 고루고루 잘사는 세상을 꿈꾸며 ‘생명공동체운동’에 뛰어들어, 우리밀살리기운동과 생활협동조합운동(생협)을 했다. 그때 먼저 숲(농촌)으로 돌아간 변산 윤구병 선생님, 봉화 정호경 신부님, 무주 허병섭 목사님, 실상사 도법 스님, 충주 무너미 마을 이오덕 선생님과 같은 참된 스승을 만나 깨달았다. 삶은 없고 입만 살아서 환경이니 희망이니 떠들어대는 내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05년(47세)부터 아무도 모르는 산골에 들어와 빈집과 묵은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았다.
아비는 농부로 살아온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땅에서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거룩한 일이 농사라 하지 않더냐. 그래서 성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직이라 하지 않더냐. 가난한 아비 삶을 지켜준 낡은 호미와 괭이는 마지막 선물로 두고 가마. 밭 한 뙈기에 호미와 괭이만 있어도 밥상에 올릴 채소는 심고 가꿀 수 있을 것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주리라 생각한다. 하루빨리 팍팍한 도시 콘크리트숲을 떠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농촌)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우리 사이에 그리움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처음부터 그랬듯이 사랑한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