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중심 대구에서도 서문시장은 성지로 통한다. 상인만 2만명인 이 거대 시장은 보수 정치인들이 철만 되면 힘 받으려, 기 받으려 ‘순례’하듯 찾는 곳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직후인 1987년 서문시장을 찾아 “보통 사람 노태우”를 외쳤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세 차례 대선 후보 시절이나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방문했다. 전 대통령 박근혜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던 2004년,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직이 위태롭던 2016년 서문시장을 찾았다. 2016년 방문 땐 “미안하다”고 했지만, 차가운 민심에 10분 만에 돌아나와야 했다.
대통령 윤석열의 서문시장행도 잦고 남달랐다. 정치 시작 후 여섯 차례 찾았다. 그때마다 그는 “권력은 서문시장에서 나오는 것 같다” “서문시장과 대구 시민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등 주옥같은 러브콜을 발신했다. 올해도 4·10 총선을 앞두고 대구민생토론회에서 “애국도시 대구의 상징”으로 국립구국운동기념관을 서문시장 부근에 건립하겠다고 했다.
서문시장이 윤석열을 지우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 윤석열이 칼국수를 먹었던 가게는 그의 사진과 친필 서명을 손님들 항의 때문에 치웠다고 한다. 검사 윤석열이 대구 근무 시절 자주 찾았던 한 국밥집에서도 사진 등이 사라졌다. 내란 수괴 윤석열에 싸늘하다 못해 질려버린 대구 민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7일 동성로에서 열린 탄핵 집회엔 2만여명(주최 측 추산)이 참여해 “윤석열 체포”를 외쳤다.
서문시장은 18세기 이후 ‘삼남(충청·전라·경상) 제일’로 이름 높았다. 섬유·철물 유통의 전국적 중심지로 1960~70년대까지도 위세가 대단했지만, 이후 섬유산업 축이 서울로 이동하며 힘을 잃었다. 서문시장의 사라진 화양연화는 한국 현대사 속 불균형 발전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그러던 서문시장이 21세기 들어 ‘핫플’이 되었다. 보수가 아닌 MZ세대의 핫플이다. 삼겹살 자장면, 칼제비 골목 등 먹거리와 각종 노포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여행객이 한번은 꼭 들를 명소로 꼽혔다. 서문시장의 윤석열 지우기는 내란 범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시민정신이 근본일 테지만, 고립된 보수 성지가 다른 민심들과 만나 ‘전국구 시장’으로 부활한 변모도 한몫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