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한국 ‘국적자’들이 자축 분위기에 취해 있을 때 2024년 평화상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이번 상은 일본의 한 반핵단체에 돌아갔다. 1956년에 탄생한 ‘니혼 히단쿄’(Nihon Hidankyo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협의회)는 핵무기 폐기, 생존자(히바쿠샤) 지원, 피폭자에 대한 보상, 핵무기의 위험성 홍보 등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왜 이런 소식은 한국에서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을까? 고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우선 노벨 문학상이 가져온 엄청난 ‘한강 신드롬’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상을 한강 아닌 외국 작가가 받았다면 ‘히단쿄’는 한국 언론 및 사회의 주목을 받았을까?
‘히단쿄’는 반핵 단체다. 일본에서도 노벨 평화상을 반기는 듯하지만, 자민당의 친미-우파 노선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껄끄러운 존재다. 일본 정부는 “좋은 일이다” “기쁘다” “평화에 대한 의지를 평가받았다” 정도로 얘기한다. ‘히단쿄’는 내부 의견이 복잡하지만, 핵에 관한 한 일본 정부에 비판적이다.
한국의 경우 환경단체 등에서 반핵/탈핵 입장을 견지하지만 대체로 다수의 한국인은 ‘친핵’이고 ‘친원자력 발전’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탈원자력 발전을 일시적으로 추구했다고 하나 핵발전이나 핵무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긍정적 태도는 해방 이후 일관성 있게 유지되어왔다. 무엇보다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로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인식이 한국인/조선인들에게는 보편적이었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가 전쟁 종식을 앞당기고 미군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신화’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뿌리박혀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소련의 동아시아, 특히 일본 진출 및 점령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원폭이 완성되지 못했다면 일본은 분할 점령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74만명 피폭자 중 조선인들은 무려 10만명에 달했다. 전체 피폭자의 13.5%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한국인/조선인들은 원폭에 마냥 박수만을 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6·25 전쟁 중 “만주에 원폭을 투하했으면 쉽게 통일이 되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던 집단적 정서가 여전히 존재한다.
“핵무기가 있으면 든든하지요”라는 인식은 박정희 정권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시도로 이어졌다. 결국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미국 카터 정부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좌절되었다(이 때문에 박 정권이 민족주의적이었다는 오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게 핵무기 개발이나 원자력 발전소 확대는, 직접적 피해 당사자인 주변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오랜 꿈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부국강병론’의 필수적 요소다. 그러니 북한의 핵 개발은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악몽이고 따라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도 빈번히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인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일본의 반핵 단체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소식은 당연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편적 가치로 등장한 탈핵/반핵 메시지를 품고 있어도 그들이 ‘일본’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심이 강하다. 사실 비핵 3원칙,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말 것”을 내세웠던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의 식자들은 ‘일본’을 한 덩어리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일본의 평화운동에 관심이 없거나 불신한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고 또한 식민지 점령의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국가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일본 국가와 일본 ‘민중’을 분리해 사고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히단쿄’는 일본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탈핵을 지향하는 평화운동은 한국 사회에서는 아주 약한 세력이다. 시민운동의 관심은 인권, 환경, 민주주의, 젠더 등에 쏠려 있다. 대표적인 평화운동체를 꼽아본다면 한 번에 떠오르는 시민단체가 있는가?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하면 이번 평화상을 기반으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탈핵 운동이 퍼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피폭 내셔널리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히단쿄’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한 한국인의 진정한 관심은 아주 희귀한 자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보통 한국인에게는 여전히 낯선 단체이고 낯선 평화주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