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단독 수정을 거쳐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내년도 예산에는 정부 예비비가 2조4000억원 삭감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관심 사업인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 예산도 반영되지 않았다. 야당과 정부·여당 모두 각자 필요한 사업 예산 증액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 편성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탄핵 정국으로 국정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경 편성 여부도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다.
이날 국회를 통과한 예산은 정부안에서 4조1000억원을 삭감한 673조3000억원 규모다. 민주당이 깎은 내년 예산 4조1000억원 중 58.5%는 ‘정부 쌈짓돈’으로 불리는 예비비 감액분이다. 야당은 정부가 올해보다 14.3%(6000억원) 증액해 편성한 예비비 4조8000억원 중 절반인 2조4000억원을 잘라냈다. 정부·여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2기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정상외교 활성화’ 등을 이유로 예비비 증액을 요구해왔다. 본회의를 앞두고 이날 시도한 야당과의 막판 협상에서는 재해·재난 등에 쓰는 예비비 1조6000억원 증액을 요구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비비는 정부가 재해·재난 등 비상시에 국회 심의 없이 쓸 수 있는 비상금이다. 정부는 지난해 대통령 해외 순방비 등에 역대 최대 규모인 532억원의 예비비를 끌어써 논란이 된 바 있다.
내년 예산에선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의 특수활동비(82억5100만원), 검찰 특정업무경비(507억원)와 특활비(80억원), 감사원 특경비(45억원)와 특활비(15억원)도 삭감됐다. 동해 심해를 탐사·시추하기 위한 대왕고래 프로젝트 예산 497억원, 용산공원 조성 예산 229억원도 삭감됐다.
이재명 대표의 관심 분야인 지역사랑상품권 예산도 정부 원안대로 0원이 확정됐다. 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은 여야 합의로 2022년 7000억원, 지난해 3500억원, 올해는 3000억원이 편성된 바 있다. 이에 정부·여당은 이날 예비비 등을 증액하는 조건으로 지역사랑상품권 예산 4000억원 신규 편성을 야당에 제안했으나, 민주당이 1조원 증액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헌법상 국회는 정부 동의 없이 예산을 삭감만 할 수 있고 증액은 할 수 없다. 여야 합의에 실패하면서 야당의 관심 예산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정부 원안에 있던 민생 예산은 내년부터 시행된다. 기초생활수급자 생계급여가 내년부터 4인 가구를 기준으로 2200만원에서 2341만원으로 연간 141만원 오른다. 육아휴직 급여는 월 150만원에서 월 최대 250만원으로 늘어난다. 정부는 내년까지 공공주택 25만2000가구를 공급할 예정이다.
내년 정부 예산이 올해보다 2.5% 늘어난 데 그친 ‘슈퍼 짠물 예산’이 된 것은 한계로 남는다. 트럼프 미 행정부 2기 집권과 윤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인한 경제 하방 압력, 내수 부진 등에 재정이 제대로 대응하기엔 부족한 규모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야당은 정부가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3.2% 늘린 677조4000억원으로 편성했을 때도 경기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짠물 예산’이라고 비판해왔다. 이에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생과 경제 회복을 위해 증액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추후 추가경정예산안(추경) 등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심은 정부가 내년 추경을 편성할지로 모아진다. 정부 입장에선 예비비와 특활비 삭감이, 야당 입장에선 지역사랑상품권 등 ‘민생 예산’ 증액이 아쉽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간의 재정건전성 추구 기조를 바꿔 트럼프 2기 집권 등 대내외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재정을 확대할 여지도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대외 불확실성이 커졌기에 경제와 민생활력을 위해 앞으로 재정이 확실하게 역할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윤 대통령 탄핵 정국이 지속되고 있어 정부가 국정 공백 상태에서 책임 있게 추경안을 편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