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법 반대 등 민주화운동가
사자바위서 ‘루쉰 시구’ 사진
법원 “표현의 자유 해당” 판결
검찰의 마구잡이 기소에 제동

찬 카카우가 지난해 9월28일 홍콩 사자산 사자바위 공원에서 루쉰의 1932년 시 ‘자조’의 시구 일부를 적은 현수막을 펼치고 사진을 찍고 있다. 찬 카카우 페이스북 캡처
산꼭대기 공원에서 당국 허가 없이 저항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펼쳐 재판에 넘겨진 78세 홍콩 민주화운동가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11일 홍콩프리프레스에 따르면 전날 카오룽시지방법원은 공원에서 무단으로 현수막을 게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찬 키카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홍콩에서 ‘찬 할아버지’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그는 2023년 9월28일 홍콩의 대표 하이킹 코스인 사자바위(라이언록) 정상에서 두 개의 현수막을 펼쳐 들고 사진을 찍었다.
현수막에는 한문으로 “사나운 눈썹을 하고 천 개의 손가락질에 냉정하게 저항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고개를 숙여 소가 되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루쉰이 1932년 발표한 시 ‘자조’의 한 구절로 민중을 위해 애쓰면서도 비난에 직면했을 때 굳건히 맞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콩 검찰은 찬이 국가공원법을 어겼다며 기소했다. 공원 규정에 따르면 허가 없이 표지판, 공지, 포스터, 현수막 또는 광고를 부착·전시하면 최대 2000홍콩달러(약 36만원)의 벌금이나 징역 3개월에 처할 수 있다.
법원은 “공원 측 허락 없이 현수막을 펼친 것만으로 범죄”라는 검찰의 주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검찰이 공원 규정에 나오는 ‘전시’의 개념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봤다. 찬의 행동이 다른 관광객에게 불쾌함을 유발하지도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민주화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홍콩 검찰의 마구잡이 기소가 법원에서 제동이 걸린 하나의 사례이다.
찬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기간 결성된 시민단체 ‘우리 아이들을 지켜라’의 멤버이다. 송환법 반대 시위에서도 맨 앞 대열에 서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할 때마다 침착한 태도를 요구해 시민들에게 명성을 얻었다. 시위 초기 단식투쟁에도 참여했다.
찬은 앞서 시위 도중 경찰의 불심검문에 응하지 않아 51만홍콩달러(약 9410만원)의 벌금을 내라는 명령을 받고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했다.
홍콩에서는 송환법 시위가 막을 내린 이후 경찰·검찰이 사소한 트집을 잡아 민주화 활동가를 수사·기소하거나 당국이 행정조사로 괴롭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독립서점 ‘마운트제로 북스(견산서점)’가 화재 안전 규정 등을 어겼다는 이유로 반복적으로 조사를 받다 끝내 폐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