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질서인가

임지선 경제부 차장

‘질서 있는 퇴진’이 만든 무질서
대통령·여당 탓 불확실성 증폭
금융시장·내수·투자…모두 위축
지금 필요한 건 ‘질서 있는 탄핵’

오래전 정치부에서 국회를 담당하던 시절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차량에 몇몇 기자와 동승했다. 4월, 벚꽃축제 때였다. 국회 푸른 잔디밭에 시민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김 전 원내대표는 “국회 잔디밭에 시민들이 평화롭게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느그들은 모르지?”라고 물었다. 20~30대 기자들은 말문이 막혔다. 차에서 내린 뒤 동료들과 ‘민주주의가 일상인 시대인데 정말 옛날 사람 같다’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2010년 일이다.

무려 14년이 지나서 대통령이 한밤중 계엄을 선포했다. 국회에 총 든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시민들은 여의도로 달려갔고, 국회의원들은 ‘월담’을 했다. 국회는 2시간30분 만에 계엄 해제 결의를 이뤄냈다. 무너질 뻔한 민주주의 질서를 바로잡은 순간이다. 그날 월담은 ‘질서’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들이 말하는 ‘질서 있는 퇴진’이 도리어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총칼을 동원한 대통령을 탄핵하지 않고 퇴진시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시기와 권한, 지위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내란 주동자가 옥중에서 결재를 할 수 있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물음표가 끝없이 이어진다.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는 분야가 경제다.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을 점증시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숨어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질서 있는 퇴진을 말하는 국민의힘이다.

그들이 만든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증시와 환율로 확인된다. 외국인은 한국 주식을 연일 팔고 있다. ‘개미’도 떠나고 있다. 개인들은 지난 6일부터 3일간 3조원가량의 국내 주식을 팔아 치웠다. 12·3 계엄령 사태 다음날인 4일 코스피 지수는 1.44% 떨어졌다. 탄핵이 무산된 직후인 9일에는 2.78%나 하락했다. 정부·여당이 국내 증시 이탈을 부추기고 있다.

한 나라 경제의 기초체력을 잘 보여주는 지표인 환율은 더 ‘무질서’하다. 통상 환율의 하루 변동성이 크다고 보는 기준은 10원 정도다. 비상계엄 사태 직후 환율은 1402원에서 몇시간 만에 1442원까지 급격히 치솟았다. 계엄령 사태 전후(3·4일)로 환율(주간거래 종가기준)은 7.2원 올랐다. 탄핵 무산 전후(6·9일) 변동 폭은 17.8원으로 훌쩍 뛰었다. 환율 수준도 높다. 11월 증권가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 후 전망했던 최고치는 1430원대였다. 미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 11월7일 환율도 1396.6원에 그쳤다. 탄핵이 무산된 후 9일에는 1437원까지 올랐다. 쉽사리 내려올 분위기가 아니다. 당국이 환율 방어에 얼마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한 건 재정건전성을 그토록 외친 윤석열 정부에서 안 써도 될 곳에 국가 재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융 충격은 실물경제에도 전이된다. 서울 여의도 일대의 식당과 호텔들은 연말 예약이 취소되고 있다. 해외 단체 여행도 일부 취소가 이뤄지고 있다. 외식 업계도 영향권에 들어갔다. 식당을 운영하는 어느 자영업자의 12월 매출이 줄어든다는 소리다. ‘질서 있는 퇴진’ 주장이 더 길어지면 위축되는 건 내수요, 투자심리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정치 불안이 길어지면 성장률 전망치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대까지 하향조정됐다. 외국 투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지는 않겠지만 장기화될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한국 투자 비중을 축소할 가능성이 높다.

‘무질서’가 불러오는 가장 큰 타격은 숫자로 산출되지 않는다. 다음달이면 트럼프가 취임한다.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고 관세 폭탄이 우려되는데 진두지휘할 리더십이 없다. 중요한 시기를 놓치고 있다. 한 명이라도 트럼프의 인맥을 늘려야 할 시기에 트럼프 최측근 인사는 방한을 취소했다.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 출장을 취소했고, 국내 머물던 인사도 서둘러 출국했다. 당장 국제신용평가사들이 국가신인도를 강등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니다.

이쯤되면 2016년 탄핵 당시 구호를 바꿔 외쳐야 한다. “이게 나라냐”가 아니라 “이게 질서냐”라고 되묻고 싶다.

다행인 건 우리는 ‘박근혜 탄핵’을 경험했다. 그때도 불확실성은 컸다. 다만 탄핵이라는 법적 질서를 따랐다. 당시 금융시장도 요동쳤지만 국회 탄핵안 가결,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인용 결정 등 고비고비를 넘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지금 필요한 건 ‘질서 있는 탄핵’이다.

임지선 경제부 차장

임지선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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