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 <최강야구>를 종종 본다. 프로에서 은퇴한 선수들과 프로 진출을 꿈꾸는 젊은 선수들이 ‘최강 몬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모여 아마추어 팀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이 프로그램을 아끼는 이유는, 모든 출연자들에게서 야구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부터 그렇다. KBO 리그 여러 팀의 감독을 지낸 그는 선수들에게 “여러분은 프로 출신이고, (…) 돈 받는다는 건 프로라는 것”이라며, 예능이 아닌 승리를 요구한다. 매사에 엄격하지만 자상함도 넘친다. 땡볕을 피하라고 파라솔을 챙겨놔도 그는 “선수들이 연습하는데 나만 쓸 수 없다”며 고사한다. 연습이 끝나면 함께 공을 줍고, 상대팀 선수에게도 적절한 가르침을 마다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이유다.
알바니아 출신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피라미드>의 배경은 기원전 26세기경 고대 이집트다. 왕위에 오른 새 파라오 쿠푸는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흘린다. 그러자 최측근 대신들과 점성가, 대제사장 등이 나서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 아뢴다. “무엇보다 피라미드는 권력입니다, 폐하. 억압이요, 힘이요, 부이지요. 동시에 군중을 지배하고 그 정신을 우매화하고 의지를 꺾어놓는 무엇이며 단조로움이요, 소모입니다. (…) 그 높이가 더해갈수록 그 그늘에 자리한 폐하의 백성은 미미한 존재로 보일 겁니다. 그 백성이 작아질수록 폐하의 위풍당당한 자태가 더욱 돋보일 테지요.”
그러자 쿠푸는 이전 파라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지상 최대의 피라미드 건설을 공표한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대공사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소설 속 노예들은 낮에는 일사병에, 밤에는 전갈에게 쏘일까 두려워 밤잠을 설친다. 고통을 참지 못한 어떤 노예들은 굴러 떨어지는 돌을 향해 몸을 날리기도 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젊은 파라오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대였다. 판단력을 잃은 통치자는 더 이상 통치자의 자격이 없음에도, 소설의 안과 밖에서 오랫동안 엄혹한 시절은 이어졌다.
미국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우화 <토끼들의 반란>에는 토끼들이 사는 왕국을 지배하게 된 늑대 왕이 등장한다. 늑대 왕은 토끼들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게 했고, 모든 책을 검열해 ‘토끼’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왕실 고문 여우는 사진사 원숭이에게 왕의 위용을 뽐낼 수 있는, 토끼들이 없는 사진을 찍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진 곳곳에 토끼들이 등장한다. 여우와 원숭이는 사진에서 토끼를 감추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늑대 왕은 자신의 사진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며 희희낙락했다. 토끼들은 비록 자신들의 땅에서 내침을 당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언제 어디서나 자신들의 자리에 존재하려고 애썼다. 비록 늑대가 왕일지언정, 그곳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토끼들이었다.
다시 <최강야구> 얘기다. 감독만 야구에 진심인 게 아니다. 은퇴 선수들이 몸을 날려 수비한다. 프로 시절 인정받지 못했던 어떤 선수는 몬스터즈에서 야구의 묘미를 깨닫는다. 프로를 고대하는 젊은 선수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치고 달린다. 상대팀 선수들도 이름값에 주눅 들지 않고 온 힘을 다한다.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를 격려하며 즐거워한다. 각설하고, 불법을 저지른 통치자는 더 이상 통치자가 아니며, 그 자리를 채운 건 늘 이름 없는 ‘토끼들’이었다. 광장에 나선 토끼들의 힘찬 함성이 벌써부터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