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이저 헤드
감독 데이비드 린치
배우 잭 낸스, 샤롯 스튜어트, 로렐 니어
상영시간 90분
제작연도 1977년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컬트’란 대중적이지 않지만 독특한 매력 덕분에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작품을 뜻한다. 영화사를 살펴보면 컬트라고 불리는 작품과 감독이 많지만 컬트의 ‘끝판왕’으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꼽는 데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영화 <엘리펀트 맨>(1980), <블루 벨벳>(1986), <로스트 하이웨이>(1997),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인랜드 엠파이어>(2006)와 TV시리즈 <트윈 픽스>까지 린치는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자신만의 컬트 세계를 만들어왔다. 자신이 영화를 좋아하고 컬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린치를 꼭 경험해야 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데뷔작인 <이레이저 헤드>(1977)는 ‘린치 월드’의 가장 원초적인 호러를 직관할 수 있다. 아직 보지 않은 독자께 경고하건대 정말 끔찍한 영화다. 많은 호러 영화가 ‘악몽’이라는 표현으로 홍보하지만 <이레이저 헤드>는 정말이지 웃음기가 싹 가시는 진짜 악몽이다. 흉측한 이미지와 금속성 사운드가 90분 내내 눈과 귀를 괴롭힌다.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꿈처럼 서사가 연결되지 않는다. 불안감과 공포감이 날카로운 손톱처럼 뇌를 찍찍 할퀴어댄다. 매우 거친 질감의 흑백 화면은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 뇌에 꾹꾹 찍어내는 듯하다.
<이레이저 헤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우주 공간에 주인공 ‘헨리’(잭 낸스)의 머리가 행성 앞에 둥둥 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헨리는 뭔가 겁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다. 헨리의 얼굴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행성의 암석 표면을 지나 피부병을 앓는 남성을 비춘다. 헨리가 입을 벌리자 입에서 정충(精蟲)처럼 생긴 괴생물체가 흘러나온다. 깨진 창밖을 내다보던 남성이 레버를 당기면 괴생물체가 꾸물꾸물 흘러간다. 헨리의 애인인 ‘메리 X’(샤롯 스튜어트)와 ‘라디에이터 여자’(로렐 니어)가 등장하는 이후 이야기는 독자의 흥미에 맡긴다.
<이레이저 헤드>는 린치가 연출·각본·제작·편집·미술·음악을 도맡았다. 1971년부터 제작을 시작해 1977년에 가까스로 완성됐다. 하지만 기괴하고 난해한 내용 때문에 극장에서 정상적으로 개봉하지 못했다. 4년이나 일부 극장에서 심야 영화로 상영되면서 ‘컬트’라는 입소문을 탔다. 결말을 열어놓은 영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영화다. 관객마다 영화의 조각을 주섬주섬 주워담아 각자의 해석과 의미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레이저 헤드>가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어둠의 망망대해에 무방비로 던져지는 압도적인 체험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데이빗 린치: 아트 라이프>(2016)를 보면 <이레이저 헤드>를 제작할 당시 상황과 생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레이저 헤드>는 미국영화연구소(AFI)의 지원을 받았지만 제작비가 부족해 린치는 영화학교 헛간에서 생활하며 작업했다. 부인이었던 페기와는 이혼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영화를 포기하고 취직해서 딸 양육비를 벌라’고 설득했지만 린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린치는 느릿느릿한 템포로 꿈꾸듯이 말한다.
“<이레이저 헤드>를 만들 때 너무 좋았고 최고 행복한 영화 작업이었어요. 그 영화를 위해 나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었고 작은 공간에 모든 걸 구비할 수 있었죠. 내가 원하는 식으로 내 세계를 만들었는데 돈도 필요 없었고 시간 투자만 하면 됐어요. 정말 아름다웠죠. 그 안의 모든 게… 그 모든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