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에 일임” 빈말 된 공언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공언한 약속을 뒤집고 있다.
임기와 국정 안정 방안을 당에 일임하겠다고 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조기퇴진 없이 국정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인사권 행사에 이어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여권에서도 “국정을 이끌 명분도 실리도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13일 국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회에 ‘대법관 마용주 임명동의안’을 제출했다. 마용주 대법관 후보자는 윤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다. 같은 날 윤 대통령은 법률안과 시행령안 총 42건도 재가했다. 이는 모두 윤 대통령이 전날 대국민 담화를 통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조기퇴진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뒤 이뤄진 일이다. 국정운영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발현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12·3 사태 후 약속, 일주일도 안 돼 “조기퇴진 없다” 입장 번복
‘동기’ 대법관 임명동의안 국회 제출…국방장관 재지명 시도
여론과 동떨어진 인식에 여당선 “명분도 실리도 잃어” 한탄
윤 대통령은 최근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을 신임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하려고 했지만 한 의원이 난색을 표한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5일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면직안을 재가하고 최병혁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최 대사가 이를 고사하자 재차 인사권 행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에서는 북한 등 외부 위협 요인에 대한 대응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한 관계자는 “사안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면서도 “2차 비상계엄은 없다는 점을 대통령이 분명히 한 만큼 국방부 장관 인선 시도는 국가 안보를 위한 조치로 봐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 북한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며 “국방부 장관만은 빠른 시일 내 임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7일 2선으로 후퇴하겠다던 대국민 약속을 적극적으로 뒤집은 행위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은 7일 담화에서 “저의 임기 문제를 포함하여 앞으로의 정국 안정 방안은 우리 당에 일임하겠다”며 “향후 국정운영은 우리 당과 정부가 함께 책임지고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한덕수 국무총리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공동 국정운영 방안을 논의했고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 퇴진과 조기대선 구상을 발표했지만 윤 대통령의 입장 번복으로 모두 동력을 잃게 됐다.
윤 대통령의 ‘2선 후퇴’ 약속이 흐지부지되면서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법안들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국회가 전날 야당 주도로 통과시킨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 지난달 28일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 양곡관리법 등은 대통령 거부권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14일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면 한 총리 권한대행 체제로 넘어가게 돼 결정권이 윤 대통령 손을 떠난다. 탄핵안이 부결되더라도 국무회의에서 재의요구안 의결을 거쳐야 하는 점이 변수로 거론된다.
국민 여론과 동떨어진 윤 대통령의 상황 인식에 대해 여당에서도 한탄과 자조가 나온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날 기자와 통화하면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의지는 강한 것 같지만 어제(12일) 담화로 국정을 이끌 명분도 실리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7일자 담화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며 정국의 키를 당에 일임하겠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날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부결시켜달라는 호소일 뿐이었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대국민 담화 형식을 빌려 그 순간의 탄핵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것”이라며 “직을 유지한들 ‘나라와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이제 누가 믿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다른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의 권능은 국민의 안전과 국익이라는 명분에서 나온다”며 “이젠 다 잃은 것 아닌가. 명분 잃은 정권이 식물 정권이 아니고 뭔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