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외신에도 충격적인 뉴스였다. 외신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중계했고, “소프트 파워의 모범”이자 “발전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위헌적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개탄했다.
한국 사태를 바삐 보도하는 와중에도 미국 기자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일부 언론은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계엄을 발동할 수 있을지 분석하는 내용의 기사나 칼럼을 썼다. 실제로 트럼프는 2020년 대선 패배 후 결과를 뒤집기 위해 참모들과 계엄령 선포 문제를 논의했으며, 2021년 1월6일 자신의 지지자를 선동해 의회의사당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만든 인물이다. 그의 전적을 고려하면 기자들이 트럼프의 계엄 발동을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계엄처럼 극단적인 조치는 아닐지라도 내년 1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대통령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꼴을 보게 되리라는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취임 첫날’ 공약이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 독재자가 되겠다”며 취임식 당일부터 본인 공약을 밀어붙이겠다고 큰소리쳤다.
공약 중 하나는 1·6 의회 폭동 사태로 유죄가 인정됐거나 조사 중인 폭도들에 대한 사면을 “취임하고 9분 안에” 시작한다는 것이다. 1·6 폭동과 관련해 폭력, 재물손괴 등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은 1500여명이고 이 중 600여명은 짧게는 징역 수개월, 길게는 22년을 선고받았다. ‘민주당이 부정선거를 통해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음모론에 경도돼 의회에 난입한 이들이 죗값을 치르지도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할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
트럼프는 또 취임 첫날 불법 이민자를 대규모 추방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민자를 붙잡고 내쫓는 데 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했다. 연방법이 미국 내 법 집행에 군을 투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미국 내 불법 이민자는 1100만명 이상이다. 트럼프가 이 많은 사람을 붙잡겠다고 군을 동원하고, 저항하는 이민자들에게 군이 무력을 행사하기라도 한다면 단속 현장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트럼프는 정적에게 보복하기 위해 법무장관에 팸 본디 전 플로리다주 법무장관, 연방수사국(FBI) 국장에 캐시 파텔 전 국방장관대행 비서실장 등 충성파를 지명하고 이들 기관을 정적 사냥 도구로 전락시키려는 계획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민주), 자신을 기소한 앨빈 브래그 맨해튼지방검찰청 검사, 잭 스미스 특별검사 등이 수사와 기소에 직면하리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전·현직 고위공직자들이 고초를 겪을 가능성이 있다.
FBI 국장 후보자 파텔도 그 자신이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파텔은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한 2020년 대선은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2023년 저서 <정부 갱스터>에서 “백악관을 되찾고 갱스터들을 제거할 것”이라고 했다. 갱스터 목록에는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은 사람을 포함해 전·현직 공직자, 민주당 관계자들의 이름이 열거돼 있다.
트럼프 측 인사들이 복수를 다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트럼프가 사돈과 예비 며느리를 외교관 자리에 앉혀 공직을 사유화하려는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여겨질 정도다. 트럼프는 큰딸 이방카의 시아버지 찰스 쿠슈너를 주프랑스 대사, 작은딸의 시아버지 마사드 불로스를 아랍·중동 선임고문, 장남의 약혼녀를 주그리스 대사로 낙점했다. 족벌주의라는 지적과 함께 쿠슈너가 탈세, 불법 선거자금 제공, 허위 진술 등 혐의로 2년을 복역한 전과자라는 점이 논란이 되고 있다.
트럼프 인선 중 문제 인물이 소수라면 인준 권한을 가진 연방의회 상원이 이들을 저지하는 일도 비교적 간단할 수 있다. 그러나 흠결 있는 사람이 워낙 많아 상원이 이 중 최악의 한두 명을 걸러내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인사 지명은 인준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직에 법치와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트럼프 당선인부터가 자신의 화보 등 ‘굿즈’를 팔아 수익금을 자기 주머니에 챙기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큰 기대는 하기 어려워 보인다.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윤석열 대통령은 결국 민의를 이기지 못하고 탄핵 심판을 받게 됐다. 트럼프 당선인을 비롯해 차기 행정부 고위당국자들에게 한국의 정치 상황이 반면교사가 되길 바란다.

최희진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