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현황
전기차 시장 둔화로 직격탄을 맞은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사면초가에 놓였다. K-배터리는 이미 중국산 배터리와의 경쟁력에서 밀리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미국 신정부의 배터리 정책 변화 가능성도 발등의 불이 됐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대미 협상력마저 떨어질 것으로 전망돼 국내 배터리 3사의 불안감만 커지는 형국이다.
취임 첫날 ‘전기차 의무화’를 즉시 종료하겠다고 밝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새 행정부 출범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부효율부(DOGE) 공동수장으로 임명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시장 독식’이라는 자신만의 셈법으로 전기차 세액공제를 없애야 한다며 조 바이든 정부의 친환경 정책 폐지에 불을 붙였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미국 내에서 만든 배터리·전기차에 한정해 보조금과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제도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이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배터리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트럼프 귀환 대비해야 하는데
만약 트럼프 당선인의 공언대로 IRA에 따른 세액공제가 폐지 또는 축소된다면 국내 업체들의 경영전략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트럼프 당선 이후 치솟은 환율도 현지에서 공장을 짓기 위해 달러로 자금을 조달한 업체엔 부담으로 작용한다. 경우에 따라 대미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미국은 배터리 제조 기술 역량이 없기 때문에 우리 배터리 산업은 미국의 약점을 해소해주는 해법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해야 할 것”이라며 “트럼프 2기의 전략적 사업 파트너가 될 수 있는 핵심 방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IRA 세액공제 폐지 또는 축소로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감축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 장악력이 오히려 높아지는 역효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안정한 국내 상황이 산업계의 불확실성을 더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14일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돼 본격적인 탄핵 정국에 돌입했지만 국정이 정상화되려면 수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우방국으로 꼽히는 캐나다에 대한 관세를 25% 인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며 관세전쟁을 예고한 가운데, 정부 주도의 통상 문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대응이 중요한데 국내 정치 상황으로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피즘’에 공든 탑이 무너질까 하는 우려를 모든 업체에서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최근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과 날을 세우면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을 자신의 취임식에 초청한 바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트럼프가 향후 중국에도 배터리 시장을 개방해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면 한국 기업은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라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배터리 전문 전시회 ‘인터배터리 2024’가 개막한 6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 마련된 SK온 부스에 차량용 배터리가 전시돼 있다. 조태형 기자
■미국 밖에서 펼쳐지는 배터리 전쟁
한국 배터리 업계는 유럽에서도 고군분투 중이다. 유럽은 북미에 이어 두 번째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성장률이 높은 지역으로,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전기차 시장이다.
지난달 말 유럽 최대 전기차 배터리 업체인 스웨덴 노스볼트의 파산보호 신청으로 유럽의 배터리 자급자족이 어려워지면서 유럽 내 한·중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배터리 3사는 중국보다 앞서 유럽에 생산기지를 건설해 기반을 다져왔다. 그러나 미국 제재를 피해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선 중국 업체들은 유럽에 생산공장을 짓거나 아프리카 등 제3국에서 생산하는 우회 전략을 세우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 행정부 집행위원회는 중국산 수입 전기차에 대해 5년간 상계관세를 부과하기로 하고 최종 관세율을 최대 45.3%로 인상한 바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유럽 역시 미국만큼 녹록한 시장은 아니지만 배터리의 질적 성장과 공격적인 투자로 유럽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배터리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 배터리의 EU 시장 점유율은 2022년 약 33%에서 지난해 42%로 늘어난 반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64%에서 55%로 줄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는 중국이 오랫동안 만들어왔고 가격 측면에서도 경쟁력이 있지만 기술적인 진입 장벽이 낮은 만큼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다”며 “중국 배터리 기술은 급하게 성장한 만큼 특허나 지적재산권 도용 문제도 많아 한국이 기술 리더십을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K-배터리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는 유럽 시장 점유율 증대가 필수인 만큼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전기차 및 배터리 전문가들은 2026년 이후 전기차 시장 활성화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고 있다. 내연기관차와 가격 차이가 없는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서는 저가형 배터리 모델 개발이 필수다. 이를 위해 국내 배터리 기업들도 가격 경쟁력을 갖춘 LFP 배터리 생산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박 상근부회장은 “트럼프 2기 전기차 정책은 정부 보조금이 아닌 시장 주도 성장으로, 가격과 기술 혁신 경쟁이 핵심”이라며 “제조공정 혁신, 제품 포트폴리오 다양화, 에너지저장장치(ESS)·우주항공 등 신규 배터리 시장 투자 가속화, 연구·개발(R&D) 자금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테네시주 스프링힐에서 가동중인 LG에너지솔루션과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배터리 합작법인인 얼티엄셀즈의 제2공장.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