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오(慶應) 3년 12월9일(양력 1868년 1월3일), 조정 대신들이 퇴청하자 일군의 병력이 교토 궁궐의 주요 출입문을 에워쌌다. 주력 부대는 사쓰마번(薩摩藩) 병사들이었다. 전날부터 궁중에선 조슈번(長州藩) 사면 문제를 논의했다. 조슈번은 1864년 교토를 공격한 죄로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이 되었다. 밤을 새운 격론 끝에 조슈번을 사면키로 결정하고 대신들은 궁궐을 나왔다. 그러나 이날 정변을 사전모의한 자들은 궁중에 그대로 머물렀다.
출입문 봉쇄가 확인되자 소년 메이지 천황(15세)을 인형처럼 앉혀두고 ‘왕정복고 대호령’이 반포되었다. 조정과 막부의 주요 관직을 폐지하고 천황 밑에 총재·의정·참여라는 새로운 관직을 설치했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왕정복고 쿠데타’라고 부른다. 총재에는 황족, 의정에는 황족·상급 공경과 다이묘(大名), 참여에는 하급 공경과 번사(藩士)가 임명되었다. 총재는 의례적인 직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의정과 참여가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는데, 당시에 이를 각각 상원(上院), 하원(下院)으로 불렀다. 이 시기 여러 개혁가들이 서양을 모델로 한 의사원(議事院), 혹은 의정원(議政院) 설치를 제창했는데, 얼추 그 모양이 갖춰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변 과정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비록 병력은 출동했지만 무력충돌이나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 뒤 벌어진 갑신정변의 참극과는 대조적이다.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물론, 강경파이자 교토에 막강한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던 아이즈번(會津藩)도 정변 사흘 뒤 조용히 오사카로 물러났다. 또 하나의 특징은 중간파 정치세력이 대거 정변에 가담한 것이다. 거기엔 오와리번(尾張藩), 에치젠번(越前藩) 같은 막부의 친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정변 후에도 막부세력을 신정권에 참여시키고자 줄기차게 노력한다. 양측이 대규모 무력충돌까지 가지 않은 데엔 이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다음으로 정변 주도 세력인 사쓰마나 조슈 세력이 한동안 신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새롭게 세워진 정권이 사쓰마 막부나 조슈 막부가 아니고 천황 정부인 이상 무가(武家)인 사무라이들이 공가(公家)의 정치 공간인 궁중에서 정치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그만큼 전통과 관례의 무게는 무거웠다. 사쓰마 세력은 뭐 하나 결정하려 해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나카야마 다다야스(中山忠能) 같은 조정 중신에게 의지해야 했다. 이들은 사쓰마의 꼭두각시는 아니었고, 중간파, 심지어는 정권을 스스로 반환(大政奉還)한 도쿠가와 세력에게도 호의적이었다. 이 때문에 사쓰마 세력은 정부의 논의 장소를 궁중에서 궁중 바깥의 니조성(二條城)으로 옮겨, 공가가 무가의 성으로 와 정무를 보게 했다. 그리고 이윽고 오사카 천도까지 계획한 것이다. 결국 오사카 대신 에도(도쿄) 천도로 변경되었지만, 공가의 아성 교토를 탈출한 효과는 매한가지였다.
정변 세력의 주도면밀함도 돋보인다. 이들은 정변 과정에서 조정 신하들의 중요성을 알고 이들을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모든 걸 무력으로 하려 했다면 필요 없는 노력이었다. 정변 두 달 전 막부를 토벌하라는 밀칙(密勅)을 받아냈고, 이 과정에 가담한 조정 신하들과의 결속을 강화했다. 애초에 12월5일로 예정했던 거사일은 8일로, 그리고 또 9일로 연기되었다. 중간파를 끌어들이기 위한 인내였다. 그리고 교토뿐 아니라 막부의 군사기지 오사카를 공격하기로 한 계획도 대폭 축소하여 교토 궁궐만 무력 장악하는 것으로 바꿨다. 이 모든 게 중간파와 여론을 의식한 행보였다. 그런 자세는 마침내 벌어진 무력충돌(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도 견지되었다. 쫓겨 간 막부군에 대한 추격전도 여론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천천히 진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무력보다 무서운 것은 민심이기 때문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