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저항 ‘유죄’ 60년 만에 재심 길 열린 최말자씨 “우리 후손에겐 이런 피해 없어야”

이예슬 기자
성폭력 피해자인 최말자씨가 20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열린 ‘56년 만의 미투, 60년 만의 정의’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파기환송으로 재심의 기회가 열린 것과 관련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최씨는 10대 때인 1954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은 후 70살이 넘어서야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재심청구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정지윤 선임기자

성폭력 피해자인 최말자씨가 20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열린 ‘56년 만의 미투, 60년 만의 정의’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파기환송으로 재심의 기회가 열린 것과 관련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최씨는 10대 때인 1954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은 후 70살이 넘어서야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재심청구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정지윤 선임기자

“최말자님은 무죄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합니다, 만세!”

20일 오전 10시쯤 서울 중구 모임 공간 상연재에서는 박수와 환호 소리가 쏟아졌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날 최말자씨(78)가 성폭력 피해를 당한 지 60년 만에 정당방위를 인정받기 위한 재심 가능성이 열린 것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활동가들이 “후배 여성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싸워 준 최말자님께 감사하다” “앞으로도 함께 하겠다”며 연대 발언을 이어가자 최씨는 울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마워했다.

최씨는 “모든 것은 물방울이 한 방울씩 바위를 뚫듯이 연대를 모아준 여러분 덕분”이라며 “정말 고맙고 만세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죄가 나오고 정당방위 나오도록 앞으로도 부탁드린다”며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런 피해자가 없도록 모두 도와주시라”고 했다.

1964년 최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 검찰은 최씨를 6개월 넘게 구속 상태로 수사한 후 중상해죄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최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가해자보다 무거운 형이었다.

최씨는 2020년 자신의 정당방위를 인정받고자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재심 청구와 항고를 모두 기각했다. 이에 최씨는 2021년 대법원에 재항고했고, 대법원은 전날 최씨의 항고에 대해 원심판결을 파기하며 재심의 길을 열어주었다. 사건을 돌려 받은 부산고법이 최씨의 재심 청구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면 최씨는 과거 유죄 판결에 대해 다시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된다.

최씨가 만학도로 입학한 방송통신대학교의 정준영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최씨는 말자라는 이름을 태어나서 가부장제의 압박을 뛰쳐나오신 분”이라며 “(이번 재심 개시로) 가부장제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평탄하게 만들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최씨의 변호인인 김수정 변호사는 “당연하지만 감사한 결정”이라면서도 재심 청구 과정에서 발견된 증거와 재판부의 인권 침해가 대법원의 재심 사유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쉽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최씨가 가해자를 평생 말을 못 하는 불구로 만들었다’는 판결문과 달리 가해자가 판결 이후 정상적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군 생활을 마친 증거가 있었으나 이는 재심 사유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당시 미성년자였던 최씨가 재판 과정에서 ‘처녀였냐’ ‘가해자와 결혼하라’는 식의 인권 침해를 당한 것도 재심 사유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정의의 문’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2018년 ‘미투’ 운동에 나선 여성들을 보고 ‘후배 여성들이 억울한 일이 없게 하겠다’고 다짐한 최말자님의 용기 덕분”이라 말했다. 이어 “대법원의 결정은 또 다른 시작”이라며 “우리 사회가 성폭력 생존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기회를 마련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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