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농민회총연맹이 트랙터를 몰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다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가로막혀 밤새 대치한 다음 날인 22일 시민들이 모여 집회를 이어나가고 있다. 정효진 기자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 역사 / 삼천리 방방골골 농민의 깃발이여 / 찬란한 승리의 그 날이 오길 / 춤추며 싸우는 ‘우리들’ 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 인근에서 벌어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밤샘 농성장에선 민중가요 ‘농민가’의 개사곡이 울려 퍼졌다. 전농이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이라는 원곡을 ‘우리들’로 바꿔 선창하자 시민들이 따라 부르며 화답했다. 각종 응원봉을 든 2030여성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울렸다. 윤석열 대통령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차 등을 타고 상경 시위에 나선 이들이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자, 영하의 날씨에도 시민 수천명이 한밤에 거리로 나와 시위에 가세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 무대에 올라 발언하고 있다. 전장연 SNS
이 장면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다시 열린 광장의 특성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지난 3일 이후 매일 여의도 국회 앞과 광화문 일대에서 윤석열 퇴진을 촉구하며 열린 촛불집회는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빛났다. 토요일마다 열린 촛불행진은 주최 측 추산 누적 참가인원이 3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집회인데도, 과거 집회에서 슬그머니 또는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여성혐오 발언이나 일부 단체의 남성중심적·배타적 시위 문화는 보기 힘들었다. 참가자들은 노조·정당·단체의 깃발 아래 ‘단일대오’를 꾸리는 것 대신 직접 만든 각양각색의 깃발과 K팝 가수의 응원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촛불의 변화, ‘응원봉’만이 아니다
무대에선 ‘소수자’가 끊임없이 호명됐다. 집회 주 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더는 ‘중장년 고학력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이 아니었다. 20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농민들이 과거의 주류를 대체했다. 서울에선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무대에 엎드려 “장애인도 교육받고, 노동하고, 이동하게 해달라”고 발언해 환호가 이어졌다. 대구에선 “TK(대구·경북)의 딸들이 너희를 깨부수러 왔다”는 손팻말이 눈길을 끌었고, 부산에선 자신을 ‘술집 여자’라고 밝힌 여성이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달라”고 말한 것이 큰 화제가 됐다. 이들은 “윤석열 퇴진이 전부가 아니다. 민주주의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며 경제 불평등, 양극화, 젠더 폭력, 기후 위기, 성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 장애인의 이동권을 외쳤다.
주최 측도 ‘혐오 없는 광장’을 위해 안팎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150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집회 시작부터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을 참가자들과 함께 낭독하며 문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의 광장이고 민주주의다”로 시작하는 이 약속은 이렇게 이어졌다.
“민주주의는 성별·성적지향·장애·연령·국적 등 서로 다른 사람이 배제되지 않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 집회 발언 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승훈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하려면 이 광장이 물리적, 심리적으로 안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여러 계층과 세대를 품기 위해 높은 감수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부에도 있었고, 그게 약속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때만 해도 여성 비하 발언이나 집회 참가자 성추행 등이 문제가 됐는데, 지금은 시민의식도 한층 성숙해진 것 같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잘못은 수정하면서 일종의 쌍방향 집회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가수의 노래는 무대에서 틀지 않고, ‘형제들’을 ‘우리들’로 고쳐 부르는 장면도 소통으로 이뤄진 변화라고 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에 참석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SNS
‘탄핵 그 이후’를 말하는 광장의 외침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병폐가 ‘탄핵 정국’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 약자의 터전을 부수고 일상의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일은 그보다 더 뿌리 깊은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야구팬, 빠순이, 오타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제나씨(28)는 지난 12일과 14일 집회 무대에 올랐다. “이번 사건은 이때까지 다른 이들의 죽음에 침묵한 대가”라며 마이크를 잡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여전히 생존을 위해 싸우는 많은 이들을 만났습니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농민, 이주민들을요. 이들을 잊을 것입니까? 오래된 노래라고 함께 부르지 않을 것입니까? 연대, 단결, 투쟁을 우리는 기쁘게 배워갈 것입니다.”
김씨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이전 세대가 독재와 부조리에 맞선 결과 지금 우리가 많은 걸 누릴 수 있게 됐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라며 “아직도 폭력과 차별에 놓여 있는 약자들이 있다는 걸 안다. 이다음의 민주주의엔 이들을, 우리를 두고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은 이미 충분히 똑똑하고, 앞으로 더 현명해질 것”이라며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사법부를, 끝까지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본부장은 “탄핵안 가결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에겐 민주주의 회복을 넘어서 더 나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자로 불렸던 이들이 주력으로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며 “이 땅의 민주주의는 차별받고 소외당한 이들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우리도 국민임을 얘기하면서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광장의 외침은 정치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던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가 침해된다고 느꼈고, 엄청난 제왕적 권력이 더 이상 용납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음의 국회와 대통령이 시민을 단순히 ‘집회 머릿수 채워주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패권 정치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방향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내고, 이걸 어떻게 실제로 반영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이기도 한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대통령이 바뀐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로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 때 이미 그걸 봤다”며 “소수자들의 발언이 ‘기특하고 대단한 것’으로 폄하되지 않고, 사회 구성원 한 사람의 목소리로서 확실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일상의 민주주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