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광장의 중심으로

윤석열 관저 향하는 트랙터…응원하는 시민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농민이 몰고 온 트랙터가 22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 도착하자 농민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전농 소속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 30여대와 화물차 50여대는 전날 오전 8시부터 서울에 진입하려다 서초구 남태령 인근에서 경찰에 저지된 뒤 약 32시간 동안 대치했다. 권도현 기자
“각양각색 사람들, 일상의 민주주의 지키려 쏟아져나와”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 역사/ 삼천리 방방골골 농민의 깃발이여/ 찬란한 승리의 그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우리들’ 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 인근에서 벌어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밤샘 농성에선 민중가요 ‘농민가’의 개사곡이 울려 퍼졌다. 전농이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이라는 원곡을 ‘우리들’로 바꿔 선창하자 시민들이 이를 따라 부르며 화답했다.
각종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윤석열 대통령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차 등을 타고 상경 시위에 나선 이들이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자 시민 수천명이 한밤에 거리로 나와 시위에 가세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 장면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집회의 특성을 보여준다. 지난 3일 이후 매일 여의도 국회 앞과 광화문 일대에서 윤석열 퇴진을 촉구하며 열린 촛불집회는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빛났다. 토요일마다 열린 촛불행진은 누적 참가인원이 300만명(주최 측 추산)을 넘는 대규모 집회인데도, 과거 집회에서 있었던 여성혐오 발언이나 일부 단체의 남성중심적·배타적 시위 문화는 보기 힘들었다. 참가자들은 노조·정당·단체의 깃발 아래 ‘단일대오’를 꾸리는 것 대신 직접 만든 각양각색 깃발과 K팝 가수의 응원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무대에선 ‘소수자’가 끊임없이 호명됐다. 집회 주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더는 ‘중장년 고학력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이 아니었다. 20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농민들이 과거의 주류를 대체했다. 서울에선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무대에 엎드려 “장애인도 교육받고, 노동하고, 이동하게 해달라”고 발언해 환호가 이어졌다. 대구에선 “TK(대구·경북)의 딸들이 너희를 깨부수러 왔다”는 손팻말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윤석열 퇴진이 전부가 아니며, 민주주의 안에는 수많은 이가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며 경제 불평등, 양극화, 젠더폭력, 성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 해소,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외쳤다.
주최 측도 ‘혐오 없는 광장’을 위해 안팎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150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을 참가자들과 함께 낭독하고 집회를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성별·성적지향·장애·연령·국적 등 서로 다른 사람이 배제되지 않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 집회 발언 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승훈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하려면 이 광장이 물리적, 심리적으로 안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여러 계층과 세대를 품기 위해 높은 감수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게 약속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때만 해도 여성 비하 발언이나 집회 참가자 성추행 등이 문제가 됐는데, 지금은 시민의식도 성숙해진 것 같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잘못은 수정하면서 쌍방향 집회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가수의 노래는 무대에서 틀지 않고, ‘형제들’을 ‘우리들’로 고쳐 부르는 장면도 소통으로 이뤄진 변화라고 했다.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병폐가 ‘탄핵 정국’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 약자의 터전을 부수고 일상의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일은 그보다 더 뿌리 깊은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야구팬, 빠순이, 오타쿠’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제나씨(28)는 지난 12일과 14일 집회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전 세대가 독재와 부조리에 맞선 결과 지금 우리가 많은 걸 누릴 수 있게 됐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라면서 “아직도 폭력과 차별에 놓여 있는 약자들이 있고, 이다음 민주주의엔 이들을, 우리를 두고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은 이미 충분히 똑똑하고, 앞으로 더 현명해질 것”이라며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사법부를 끝까지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광장의 외침은 정치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온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가 침해된다고 느꼈고, 엄청난 제왕적 권력이 더 이상 용납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다음 국회와 대통령은 시민을 단순히 ‘집회 머릿수 채워주는 존재’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