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격차에 정부 책임이 크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의 국민인식 조사 결과가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본질은 외면하고 표현을 문제 삼아 보건복지부가 압박했다고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정부 행태가 어이없고 민망할 뿐이다.
23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국책연구기관인 보사연 홈페이지에서 ‘사회정책 국민 인식조사’ 연구 결과가 이틀 만에 삭제됐다. 이 자료는 지난 19일 복지부와 보사연이 공동주최한 포럼에서 발표된 다음날 복지부가 삭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보사연은 ‘92.4%가 한국의 소득 격차가 크다’ 답하고, ‘그 책임은 정부에 있다는 동의 비율이 84%를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소득 격차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과 정부의 책임 인식 모두 증가 추세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복지부는 이 조사를 두고 정부 사회정책이 역할을 더 해야 한다는 뜻이지, 소득 격차가 정부 책임인 것처럼 해석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연구 결과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국책연구기관 독립성을 침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소득 계층 간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주체는 가계나 기업이 아니라 정부다. 이 때문에 소득 격차가 커지는 건 당연히 정부의 책임이다. 소득 격차 확대 추세는 각종 통계와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통계청의 ‘3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소득 상위 20%인 5분위 소득은 하위 20%의 5.69배이고,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14배포인트 증가했다. 윤석열 정부가 한물간 낙수효과를 앞세우며 추진한 부자감세 정책이 역방향으로 적잖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비판에 귀 닫은 윤 정부의 불통과 아집이 국책연구기관까지 넓어져 우려스럽다.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R&D 예산 축소 항의자를 밖으로 들고 나간 ‘입틀막 사태’, 고등학생 풍자만화 ‘윤석열차’ 입상에 대한 경고, 윤석열 골프 현장 취재기자의 휴대폰 압수 등까지 이 정부는 외부 비판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반대로, 지난 총선 참패 후 ‘국정 방향이 옳고 열심히 했는데도 국민이 알아주지 않는다’ 우기더니, 임기 절반을 지나면서는 재정·복지·민생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성과를 냈다고 자화자찬했다. 정부 관료들은 이런 현실과 동떨어진 국정 운영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 권력엔 아부하고 국책연구기관 비판까지 무시한 독단과 불통이 계엄 망상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행정 당국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지난 11월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정부 3차 부자감세 저지 및 민생ㆍ복지 예산 확충 요구 집중행동 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