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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청소년의 ‘학교 다닐 권리’, 한국 사회는 얼마나 고민했나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트랜스젠더 프라이드 플래그’. 이준헌 기자 사진 크게보기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트랜스젠더 프라이드 플래그’. 이준헌 기자

지난해 5월 고등학교 1학년이던 은성(활동명·17)은 올해 초 학교를 그만뒀다. 은성은 트랜스젠더 남성(Female to Male, FTM) 청소년이다. 그는 법적·생물학적 성별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했다. 담임 교사 등에게는 미리 사정을 설명해두었기에 학교 측도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수련회에서 불거졌다. 남성으로 알려진 은성은, 남학생 숙소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학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학교는 ‘남녀 혼숙은 불가하며, 다른 학생들의 성적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거론하며 ‘성별을 밝히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짓을 말해 다른 학생들을 속일 순 없다’고 했다. 결국 은성은 수련회에 참여하면 법적 성별이 드러나게 될 것을 걱정해 참가를 포기했다. 이후 우울증 등이 심해져 자퇴한 후 학교 밖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은성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성별 분리시설 이용 문제로 수련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취지의 진정이었다.

인권위는 은성의 손을 들었다. 지난 8월 인권위는 학교가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수련회에서 배제한 것은 차별행위에 해당한다며 서울교육청에 트랜스젠더 학생의 교내 성별 분리시설 이용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에 관한 이해도, 지침도 없는 사회

지난 6월1일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서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정효진 기자 사진 크게보기

지난 6월1일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서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은성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초등학교 6학년 이후부터 심한 젠더 디스포리아(지정 성별과 본인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쾌감)로 학교에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여자 화장실도 남자 화장실도 쓸 수 없어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곳의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남녀 출전 종목을 분리하는 체육대회 등에도 참여하지 못하며 소외감을 느꼈다.

은성의 적응을 도우려 학교 측이 고심한 흔적도 곳곳에서 엿보인다. 해당 사건 조사를 맡은 인권위 A사무관은 “학교·담임의 대처에 아쉬운 부분도 많지만, 아무런 지침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학교 측도 사안을 다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측도 ‘수련회 참여 불가’를 일방 통보하지 않았다. 담임교사는 입학 직후부터 7차례에 걸쳐 성 정체성으로 비롯된 고민을 두고 은성과 상담했다. 수련회 참여 문제로 은성의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 교감 등 학교 측과 상담하기도 했다.

인권위 결정문에는 학교가 제대로 대응할 수 없던 현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있다. 인권위는 “진정인(은성)의 성별 정체성과 관련한 이해의 부족, 동료 학생들의 혼란스러움과 관련 지침과 부재로 인해 일선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공교육의 역할과 의미 등에 비추어 보면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이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인권위는 교육청 차원의 가이드라인 마련, 실태조사 등을 권고했다. 개별 학교가 트랜스젠더 청소년과 관련한 생활 지침 등을 마련하려면 교육청 등 더 높은 단위에서 이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다양한 성 정체성, 차별금지와 존중을 가르치는 성교육은 없다. 은성도 소통을 시도했지만, 벽을 느끼며 지냈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트랜스젠더라는 개념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며 “도덕 선생님이 교실에서 트랜스젠더 비하·혐오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교육청 산하에 ‘학생인권교육센터’를 설치한다. 이 센터는 인권 침해 진정 접수 조사·구제 등에 초점이 맞춰져 트랜스젠더 학생 인권 정책 등을 마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지난 20일 기자와 통화하며 “인권위 권고를 받은 후 업무를 어떻게 할지 업무 분담을 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인권과 대중 인식 사이의 ‘틈’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은성과 A사무관, 교육청 관계자 등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청소년에 관한 ‘최소한의 고민’조차 한국 사회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교육 현장에서 트랜스젠더 인권 정책은 운을 떼기도 쉽지 않다. 인권위 결정문이 언론에 배포된 후 담당 부서에는 약 2주간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의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고 한다.

A사무관은 “트랜스젠더 학생들의 권리는 명확하다. 본인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면 된다”며 “그에 비해 학교의 제반 시설이나 인식은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트랜스젠더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지침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하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4년 ‘학교의 트랜스젠더 관련 대응상황 실태 조사’를 발표하고 이를 기반으로 트랜스젠더 학생 대응 지침을 마련했다. 2015년에는 ‘트랜스젠더 학생에 대한 세심한 대응의 실시 등’이라는 지침을 전국 학교에 통지했다. 화장실 사용 시 학생의 성별 정체성 존중, 교직원 인권 교육 등이 포함돼 있다.

미국 교육부는 ‘트랜스젠더 학생 지지를 위한 정책과 새로운 실천의 예시’라는 문서를 만들어 트랜스젠더 학생들과 관련된 용어부터 이들의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캐나다 앨버타주, 호주 뉴 사우스 웨일스 정부 등 여러 국가에서도 유사한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학교 현장에서 적용하고 있다.

서울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은 지난달 22일 은성의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정 결과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케이크도 준비했다. 띵동 제공 사진 크게보기

서울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은 지난달 22일 은성의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정 결과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케이크도 준비했다. 띵동 제공

은성은 “인권위 결정 결과를 보고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며 “(당시에도)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관해 터놓고 (학교와)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은성이 받아든 인권위 결정은 청소년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차별에 대해 교육기관에 내린 첫 권고 조처였다.

은성은 “제 진정 결과로 희망을 품는 다른 트랜스젠더 청소년도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뿌듯하다”며 “앞으로도 트랜스젠더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은성은 최근 꿈꾸던 미술대학 진학하려 학원을 다닌다. 활동명 ‘은성’은 법적 성별 정정 후 쓰려던 이름이다. 성별 정정이 결정되면 이 이름으로 개명을 신청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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