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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과 갈무리

입력 2024.12.25 20:55

수정 2024.12.2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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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꼴이 말이 아니야!” 식당에 앉아 있는데 안쪽 테이블에서 포효하듯 들려온 말이다. 그러자 부끄럽다는 말, 뻔뻔하다는 말, 지금이 21세기가 맞느냐는 말이 연이어 쏟아져 나온다. TV 화면과 테이블 위를 번갈아 쳐다보던 사람들이 밥을 욱여넣는다. 밥심으로 다시 일해야 한다고 한탄한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든 손으로 새벽까지 물건을 날라야 한다고 한다.

한동안 뉴스를 보는 게 괴로웠다. 새 소식이 늘 희망적이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으레 난데없음, 어이없음과 함께 찾아옴을 모르지 않는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닐 때마다 시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지만, 다음날이 되어도 변한 것이 없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맥이 빠져 버린다. 밥심으로 다시 일하러 나가지만 돌아올 때면 가슴 어딘가에 숭숭 구멍이 나버린 것 같다. 의미 있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느낌이 무기력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이 시기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산문집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다산초당, 2024)를 읽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플레이션 시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쓴다. “돈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보존하고 수호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극도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어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힘을 합친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단순한 명제 앞에서, 사람됨을 헤아리며 경건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겨울은 기다림이 있는 계절이다. 어릴 땐 기나긴 겨울방학을 기다렸고, 추위에 취약해진 요즘엔 벌써부터 봄을 기다린다. 봄이라니, 한겨울에 찾는 봄나물처럼 멀게 느껴지지만 봄은 언제나 인간의 편이었다.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고 묵묵히 기다리는 일, 밥심으로 밥을 짓고 그 밥을 먹은 힘으로 다시 희망을 심는 일은 늘 인간의 몫이었다. 각자 자리에서 제 할 일을 다하면서도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칠 때면 두 발 벗고 광장에 모이는 것은 시민의 힘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면서 인간은, 시민은 더디게 오는 봄을 맞이했다. 단순하기에 지고지순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이맘때쯤 떠오르는 단어는 ‘갈무리’다. 갈무리는 “물건 따위를 잘 정리하거나 간수함” “일을 처리하여 마무리함”을 가리키는 단어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자주 소환되지만, 갈무리할 때 찾아오는 감정은 아쉬움일 때가 많다. 정리와 마무리는 내 뜻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욕심이 번번이 뜻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일과 잘사는 일의 간격이 벌어질 때, 갈무리는 언뜻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더더욱 사랑, 연대, 민주주의처럼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에 악착같이 매달려야 한다.

‘나라 꼴’이 흉흉할수록 삶은 역설적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껏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이, 실은 얼마나 어렵게 쟁취된 것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되니 말이다. 밥심으로 행하던 모든 일들이 더 이상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때의 삶은 개인의 고유한 삶이자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하는 삶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해가 넘어가고 계절이 바뀐다고 해서 무조건 삶이 갈무리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집에서, 일터에서, 광장에서.

갈무리하고 마무리 짓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무얼 하고 지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새해는 그렇게 온다. 새 소식처럼, 새 물결처럼, 새바람처럼. 봄은 요원하지만, 겨울이 끝나야 그것이 온다는 것을 이젠 안다. 이성부 시인이 ‘봄’에서 노래한 것처럼,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서울의 봄이, 대한민국의 봄이.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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