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무죄 → 항소심 유죄 → 대법원은 파기환송
원심, 동일 유형의 제품 제조·판매 ‘공동 주의의무’
대법원 “주원료 성분 달라…서로 개발 인식 못해”

최창원 전 SK케미칼 대표이사가 지난 2019년 8월 가습기살균제 참사 청문회에서 피해자들이 앉아 있는 방청석 방향으로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98명의 사상자를 낸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애경산업 관계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된 원심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앞서 실형이 선고된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성분 등이 달라 옥시의 공범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다시 판단하라는 취지다. 피해자와 시민사회단체는 “국민 건강권을 침해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26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 홍지호 전 대표와 한순종 전 상무,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1심에서 무죄로,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는데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힌 것이다.
홍 전 대표 등은 독성 화학물질을 이용한 가습기살균제 제품 ‘가습기메이트’의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고 제조·판매해 98명의 사상자를 낸 혐의로 2019년 7월 기소됐다. 가습기살균제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및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이 주원료인 옥시의 가습기살균제와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들어간 SK케미칼·애경산업의 가습기메이트로 나뉜다. 피해자들은 이들 세 기업을 포함한 여러 회사의 가습기살균제를 함께 사용한 ‘복합사용 피해자’들이었다.
2021년 1월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메이트 주원료인 CMIT·MIT과 폐질환의 연관성을 입증할 연구결과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2016년 대법원은 옥시 등의 PHMG·PGH 성분은 위해성이 입증됐다며 관련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는데, 1심 재판부는 해당 제품의 CMIT·MIT 성분은 위해성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2심 판단은 달랐다. 지난 1월 2심 재판부는 CMIT·MIT 성분과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가해기업들이 안전성을 검증할 주의의무까지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또 PHMG·PGH 성분과 CMIT·MIT 성분이 다르더라도 주원료를 소비자에게 공개하지 않아 정보의 불균형이 발생했다면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제조·판매업체에 관여한 이들을 공동정범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구조인 현대 산업사회에서 복수의 제조업자가 동일한 유형의 제품을 제조·판매할 때 이에 관여한 이들은 모두 “‘공동의 주의 의무’ 아래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복수의 여러 종류의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가 건강상 피해가 발생했을 때 각 제품의 결과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를 일일이 가려내 규명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하다”고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다시 판단을 뒤집었다. PHMG·PGH 성분과 CMIT·MIT 성분은 달리 봐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대법원은 “주원료의 성분, 체내분해성, 대사물질 등이 전혀 다르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활용하거나 응용해 개발·출시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서로 상대방 가습기살균제의 개발·출시를 인식했다거나 그에 관해 서로 의사를 연락했음을 인정할 만한 사정 또한 발견할 수 없다”고 밝혔다. SK케미칼·애경산업의 살균제와 옥시의 살균제는 전혀 별개의 상품이므로 공동정범으로 묶어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
소비자들이 주원료의 차이를 알고 구매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도 뒤집었다. 대법원은 “그런 사정들만으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한다면 인터넷망 등을 통해 국경을 초월한 상품의 구매·소비가 용이하게 이뤄지는 현대사회에서 상품 제조·판매자들 등에 대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범위가 무한정 확장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파기환송심에서 옥시의 공범이 아닌 것으로 최종 확정되면 공소시효가 만료돼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들의 범죄혐의는 그대로 면소(소송 조건 결여로 소송 종결) 판결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에선 “대법원이 결과적으로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내고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핵심과 전체를 보지 않는 대법원”이라며 “대법원 판결이 기업의 형사 책임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SK케미칼은 “판결을 존중한다”며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