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1924~2024)이 마지막으로 한국을 찾은 것은 2011년 4월, 세계 원로들의 모임 ‘디엘더스’의 대표단장으로서였다. 평양에 이어 서울을 찾은 그는 남북한 중재를 시도했지만 양측 지도자로부터 모두 외면받았다. 카터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당신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에 북한에 인권 문제를 제기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북한 정부 정책에 인권과 관련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권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권리인데,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북한에 갈 식량 지원을 억제하고 있다. 이는 군사·정치적으로 볼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명백한 인권 침해라고 본다.”
이명박 정권 당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은 뒤라 그의 발언은 한국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접근은 일관됐다. ‘가치외교’의 원조인 카터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인권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미국이 많은 지원을 했던 동맹국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 것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적성국의 인권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관여도를 높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그의 생각은 모순되지 않았다.
카터는 1994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등 한반도 문제 해결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재임 중 이집트·이스라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의 유화적 이미지는 패권국가 대통령에 어울리진 않았다. 대통령으로 재임한 4년보다 퇴임 후 40년이 더 빛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카터가 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의 삶이 ‘공적인 가치’에 복무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카터는 퇴임 후 고액 강연료를 받는 삶 대신 직접 집 짓는 노동을 하며 평화 증진과 질병·불평등 퇴치에 헌신했다. 그러면서도 소진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77년을 해로한 부인 로절린 여사와의 우애, 독실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 피부암이 뇌와 폐에 전이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2022년 연명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기 전까지 고향에서 주일 성경교실을 열었다. 끝까지 존엄함과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인간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