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위원들이 지난달 13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심사를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탄핵 소추안 가결을 하루 앞둔 날, 네 명의 심사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온종일 신춘문예 시 응모작을 읽고 있던 풍경이 문득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저물어가던 2024년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덮을 만한 사건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24년 이 땅에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실이 문학을 압도해 버린 낯선 분위기 속에서 시 응모작들을 읽었다. 기후 위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강세였고,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자기 고백적으로 드러낸 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고단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외롭고 무기력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했다.
응모작들 중 네 명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붙들었다. ‘개의 춤’ 외 4편, ‘테라스’ 외 4편, ‘테레민’ 외 4편,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을 두고 숙의의 시간을 가졌다. ‘개의 춤’ 외 4편은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자유자재로 공간을 구축하는 ‘방’의 상상력이 흥미로웠는데 예측 가능한 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다. ‘테라스’ 외 4편은 오래 시를 써 온 공력이 느껴졌다. “수없이 늘어선 토르소가 울타리로 일어나고 있었다.”처럼 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대상을 호명하거나 인칭을 사용하는 방식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점은 아쉬웠다. ‘테레민’ 외 4편 중에서는 ‘백자 앞에서’가 눈에 띄었는데 기시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에서 빚어지는 생활의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유전되는 돌봄과 성장의 문제를 식물의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는 시선이 믿음직스러웠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지만 끝끝내 살아내는 질긴 생명의 온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단 하나의 작품을 고르는 심사의 과정은 늘 어렵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이지만 사실상 마지막 몫은 당선자에게 달렸다. 호명되지 못한 응모자들의 새해도 너무 춥지 않기를 바란다. 시를 쓰며 지금 여기를 견디고 어디 먼 곳에 가닿고자 하는 당신들은 이미 시인이다. 머잖아 지면에서 꼭 만나기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시절이다. 시를 읽는 시간 동안 잠시나마 느꼈던 온기를 새해에는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심사위원 김선오·이경수·이제니·황인숙(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