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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의 시대, 지는 법을 못 배운 사람들

야구는 지는 법을 먼저 배운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그렇지 않다

잘못과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야구를 제대로 안 해보고 아는 척한 게 틀림없다. 대통령 예비 후보 시절인 2021년 모교인 충암고를 찾아갔을 때다. 투구 폼을 잡으며 다리를 들어올렸는데(리프트 동작), 중심이 뒤로(1루 쪽으로) 지나치게 쏠렸다. 왼발 착지(랜딩 동작) 때 왼손 글러브의 위치는 몸 중심을 벗어났다.

충암고 야구부 주장이 “좋은 성적을 내면 저희를 청와대로 초청해줄 수 있나”라고 물었다. 윤석열 당시 예비 후보는 “내년 졸업해서 야구 명문대에 진학하길 바라겠다. 올해 2관왕이니 떼놓은 당상이다”라고 말했고, 청와대 초청을 약속했다.

‘덕담’인 줄 알았겠지만 고교선수에게 대학 진학을 바라는 건, ‘악담’에 가깝다.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프로구단 드래프트 상위 지명을 바라는 게 맞다.(용산 이전도 계획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야구 역시 (다른 대부분 분야가 그랬던 것으로 드러나듯이) 잘 모르면서, 또는 업데이트 없이 과거 지식에 머문 상태에서 아는 척했던 게 틀림없다. 야구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헤비 팬이든, 라이트 팬이든 야구팬이라면 대부분 다 안다. ‘매일매일’ 경기하는 야구 종목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야구는 한 시즌 140경기 넘게 치른다. 프로스포츠 종목 중 경기 수가 가장 많다. 우승팀의 승률은 60% 언저리다. 제일 잘하는 팀도 10번 중 4번은 진다. 얼마나 잘 지느냐가, 다음 경기의 승리 확률을 결정한다.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 최초 헌액자 중 한 명인 명투수 크리스티 매슈슨은 “이기면 조금 배우지만, 패하면 모든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그래서 야구는 지는 법을 먼저 배운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메이저리그에 오르기 전, 마이너리그에서 3~4년 정도 경험을 쌓는다. 실수와 실패와 패배를 충분히 겪은 뒤라야 제대로 승부할 줄 알고, 성공할 수 있다는 철학이다.

실수와 실패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야구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고, 존중은 스포츠정신과 페어플레이의 기본이다. 메이저리그 최다승 2위 감독인 토니 라루사는 “야구의 신은 언제나 야구라는 경기와 상대를 존중하지 않을 때 패배라는 벌을 내린다. 나는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지금 ‘지는 법을 모르는(모른 척하는)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잘못과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나락 간다’는 나락의 시대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받는다. 내신에서, 수능에서, 취업 결정에서 하나라도 삐끗하면 회복 불가능하다는 공포를 체득한다. 그러니 첫 훈장과 첫 명함이 중요하다. 의대 쏠림과 대기업 선호는 당연한 결과다. 섣불리 연애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 역시 한 번의 실패, 한 번의 패배가 가져올 나락의 공포를 회피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잘못이 아니다’라고 우기기 일쑤다. 그 어떤 합리적 판단도 거부하고 버틴다. 패배에 대한 인정은커녕 ‘진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 부정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엄은 반대인데, 하야도 안 하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안 되는 이상한 논리를 자신있게 얘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국민에 대한 존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잘못을 인정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다. 이걸 못하면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 없다. 야구를 해봤다면, 야구를 안다면 얼른 잘못을, 패배를 인정하는 게 맞다.

2025년이 밝았다. 그래도 애써 희망을 찾는다. 야구가 보여준 적이 있다. 1994년 시즌 막판 OB 베어스는 감독의 폭행 및 얼차려 시도가 있었고, 선수들이 항명하며 팀을 떠났다. 팀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한 뒤 자진사퇴했고 OB는 새 감독 체제에서 이듬해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새 감독을 맡은 김인식 감독은, 나중에 국민 감독이 됐다. 나락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은 잘못과 패배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배워 더 나은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용균 스포츠부장

이용균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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