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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오늘’과 최성일씨

10년 전, 그는 거대한 빙벽 앞에 서 있다. 진짜 같은 가짜 빙벽의 높이는 13m 남짓. 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영화 특수미술’ 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20, 30대를 영화 특수미술의 매력에 빠져 살며 <광개토대왕> <실미도> <청련> <남극일기> 등등 내로라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특수미술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제작사에서 ‘빙벽’ 의뢰가 들어왔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재료와 제작 과정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보름 만에 완성한, 다들 감탄하던 빙벽의 수명은 단 이틀. 촬영을 마치자마자 그는 스스로 빙벽을 부쉈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자신이 만든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완성한 작품들이 주는 만족감이 큰 만큼 공허감도 컸다. 십수 년 수입이 불안정했던 데다 어떤 배신으로 파산을 선언해야 할 지경이 된 그는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빙벽을 부순 지 5년여 뒤, 마흔네 살의 그는 알코올중독자들이 입원한 폐쇄병동 휴게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스케치북이 펼쳐져 있고, 그의 손에는 연필이 들려 있다. 그가 볼펜으로 A4용지에 그린 데생을 우연히 본 직원이 그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선물했다. 그는 스케치북에 알코올중독 환자의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집중하며 스케치를 하다 보면 감정이 고요히 가라앉고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인물화를 그리는 그의 곁으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인물화가 완성되면 그것의 주인에게 말없이 선물하는 그에게 너도나도 부탁을 해왔다. “내 얼굴 좀 그려줘.” “내 어머니 얼굴 좀 그려줘.” “내 손주 얼굴 좀 그려줘.” 환자들은 그가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테이블을 ‘그의 자리’로 비워뒀다.

병동에는 그를 포함해 80여명의 알코올중독자가 입원해 있었다. 입원해 지내는 동안 그는 80여장의 인물화를 그렸고, 모두 선물했다.

그리고 오늘, 그는 태양광 모듈(태양에너지를 직접 전기에너지로 바꿔주는 셀을 전지판 형태로 가공하여 배열한 것)을 생산하는 업체에서, 완성된 모듈을 들여다보고 있다. 크랙이 가 있는지, 나방 같은 벌레가 붙어 있는지, 머리카락 같은 이물질이 껴 있는지, 간격이 맞는지. 일이 많을 때는 12시간 동안 1000개 이상의, 평소에는 600~700개 정도의 모듈 품질을 검사한다. 단순하지만 세심한 집중을 장시간 요구하는 일이다.

“오늘 이대로요, 오늘 이대로.”

오늘 이대로가 있기까지, 그는 100곳에 이력서를 냈다. 어떤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이유는 그의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 마흔 후반(1975년생). 그는 자신이 젊다 생각했다. 스스로를 책임지고 아들 도리를 하며 일상을 살아낼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구나. 퇴근을 하는구나. 매일 일을 하면서 살고 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어떤 일이라도, 어떤 일이라도….’ 그는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력서를 냈고 넉 달 전부터 일하고 있는 곳에서 기적처럼 연락이 왔다.

그가 꺾이지 않고 이력서를 ‘또’ 낼 수 있었던 건 누나 덕분. 에디트 피아프만큼 자그마한 누나. 간장 종지 작은 건 참을 수 있어도 속 좁은 건 못 참는 누나는 끝까지 그의 복원력을 믿어주었다.

거대한 것을 좇고 만들 때 그는 평균 사이즈에도 못 미치는, 이기적인 삶을 고집스레 살고 있었다. “소소한 것이 거대한 거예요. 평범한 것이 거대한 거예요.”

신기루가 그리는 거대함을 버리고, 일상 속에 가만가만 놓여 있는 거대함을 성취하며 진짜 거인이 된 그.

그의 소망은 한 가지. ‘오늘 이대로’ 내일을 사는 모습을 엄마와 누나에게 오래오래 보여드리는 것. 그리고 오늘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사는 것. “병삼아, 사랑한다.”

“나는 늦지 않았어요.” 그는 늦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것에 집중해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걸 바라보지 않아요. 예전에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걸 바라봤어요.” 아침 6시50분. 집을 나서며 그가 하는 다짐은 “오늘도 재밌게 일하자”. 새벽 바다처럼 검푸른 모듈을 응시하는 그는 한없이 젊다. 한없이 거대하다.

김숨 소설가

김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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