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담긴 ‘격’ 있는 소비

맞춤 슈트를 주문할 때처럼 ‘럭셔리’ 승용차의 경우 고객의 취향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을 개인화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롤스로이스의 2024년 용의 해 기념 ‘비스포크’ 서비스의 디테일.
롤스로이스 ‘비스포크’
벤틀리 ‘뮬리너’
포르셰 ‘존더분쉬’ 등
딱 한 대뿐인 내 차 만들기
얼마보다 어떻게 쓸지가 중요
‘일상과 호사’라는 제목에서 ‘호사’는 ‘럭셔리’를 대신할 수 있는 한국어 단어를 찾은 결과였다. 아무래도 럭셔리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오해가 많아서였다. ‘럭셔리’라는 단어에는 비싼 것, 명품, 젠체하는 물건이나 경험, 일반적으로는 접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뽐내듯하는 뉘앙스가 어쩔 수 없이 붙어 있었다. 누가 무척 비싼 걸 샀고, 그걸 갖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연료로 삼는 유튜브 채널도 너무 많았다. 그 역시 럭셔리의 어쩔 수 없는 단면이겠으나 굳이 칼럼을 통해 집중하고 싶은 특성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진짜 럭셔리의 다양하고 일상적인 면면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다. 오늘은 ‘럭셔리’라는 거대한 단어의 일부에서 길어올린 진짜 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마침 새해이기도 하니까.
지난 17년 남짓 에디터이자 칼럼니스트로서 이른바 럭셔리 시장의 중심과 변방에서 가장 깊숙하게 취재해온 분야는 역시 자동차였다. 못 잊을 경험들을 숱하게 했다. 지난해 11월 중순에는 20시간 이상을 날아가 가까스로 도착한 남프랑스 교외 도로에서 새로 나온 롤스로이스와 주말을 보냈다. 약 14년 전, 2011년에는 베이루트 시내 담벼락에 남은 총알 자국을 보면서 벤틀리의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기도 했다. 몇 년 전인가의 테네리페섬에서는 메르세데스-벤츠 컨버터블을 타고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고도의 산길을 시속 100㎞로 달려보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BMW에서 미리 정해놓은 시승 코스를 벗어나 탈주하는 사람처럼 희망봉으로 달렸다.
자동차 브랜드의 초청이었지만 자동차가 전부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항공과 현지에서의 숙박, 섬세하게 준비되어 있는 저녁식사와 리셉션 같은 경험들이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촘촘히 건축하고 있었다. 롤스로이스 고스트 시리즈 2 글로벌 시승회가 열렸던 남프랑스의 와이너리 샤토 라 코스트는 그 자체로 롤스로이스가 예술작품에 가까운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라는 사실에 대한 은유에 가까웠다. 페라리와 함께했던 이탈리아 남부 와이너리에서의 경험들은 페라리가 오로지 트랙만을 위한 슈퍼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호젓한 풍경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마감과 마감 사이, 모자란 수면시간과 과로 사이에서 경험한 것들이 일관되게 가리키는 거대한 단어가 바로 럭셔리였던 것이다.
값비싼 자동차 자체보다 그를 둘러싼 유무형의 것들. 엔진의 힘이나 연비처럼 똑 떨어지는 숫자는 그야말로 자동차의 일부를 설명할 뿐이었다. 그보다는 공간과 태도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디테일들이 거대한 철학을 완성하고 있었다. ‘브랜드’라는 단어는 그 과정에서 설득력을 찾는 것 같았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의 지향점과 캐릭터가 서울과 부산만큼 다른 이유였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의 슈퍼카들에는 (승리를 지향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같은 점이 거의 없었다. 같은 분야의 비슷한 브랜드를 비교해봐도 같을 것이다. 제네시스와 렉서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는 가격대가 비슷해도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벤틀리의 뮬리너 서비스에서 선보인 돌을 저며 만든 스톤 베니어.
“우와, 그런 차는 얼마나 해?”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같은 차를 프랑스와 영국에서 시승하고 돌아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었다. 가장 대중적인 조건은 아무래도 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5억… 정도일까?” 어림잡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도의 자동차들은 사실상 정해진 가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맞춤 슈트를 주문할 때 원단부터 핏까지 섬세하게 고를 수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개인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자동차라는 물성이 디테일과 정서에 닿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취향 같은 단어들이 끼어드는 것이다. 주문하면 손으로 만든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구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롤스로이스에서는 ‘비스포크’, 벤틀리에서는 ‘뮬리너’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서비스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비스포크나 뮬리너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의 조합이 거의 무한의 수에 가까워서 또렷한 취향이 없으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라서다. 베니어를 보리수나무로 할 건지 호두나무로 할 건지, 유광이 좋은지 무광을 선호하는지, 돌을 저며 만든 스톤 베니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또 어떤지….

포르셰의 존더분쉬팀이 포르쉐코리아 10주년 기념으로 만든 서울의 야경 시티라인 이미지.
포르셰에도 ‘존더분쉬(Sonderwunsch)’라는 이름의 특별 주문 프로그램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특별한 소망(Special Wish)이라는 뜻이다. 자동차를 사는 비용 외에 약 10만유로(약 1억5300만원)를 내면 포르셰가 당신을 위한 하나의 팀을 구성한다. 그때부터는 독일의 전문가들과 함께 오로지 내가 원하는 포르셰 한 대를 제작하는 것이다. 시간과 가격은 원하는 바에 따라 천차만별. 지금 당장 살 수 있는 포르셰 한 대를 갖는 것도 꿈을 이루는 방법이겠으나, 조금 더 개인적이고 호사스러운 방식으로 유일해지는 방법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요지는 ‘얼마인가’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럭셔리에 근접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한해진다.
어떻게 벌었는지도 모르는 돈을 써서 최고로 비싼 차를 산다 해도 다 같은 건 아니고, 돈을 쓰는 방식과 철학에 따라 럭셔리에도 격이 생긴다는 걸 그런 브랜드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내가 지구에 단 한 명인 것처럼 내 차도 지구에 딱 한 대뿐이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소유하는 자동차는 몇 년 후에 신형이 나온다 해서 낡지 않는다. 그야말로 나만의 소장품이자 클래식이 되는 셈이다.
선택지가 무한할 땐 개인 취향과 이야기만이 결정의 근거가 된다. 그게 없는 사람, 압도적으로 비싸 보이고 대체로 조용한데 경우에 따라 우렁찬 배기음을 내면서 달리고 싶은 정도의 부자라면 그저 정해진 옵션을 고르는 게 속 편할 일이다. 어디 가서 과시하고 싶은 마음뿐인 사람에게도 이런 서비스가 필요할 리 없다.

독일 디자이너가 ‘타이칸’을 한글로 디자인해 음각한 헤드레스트.
돈은 쉽다. 많이 쓰면 쉽고 확실하게 돋보이거나 구별될 수 있다. 부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시대, 자동차만큼 확실한 이름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와 취향은 돈이 많아도 쉽지 않다. 매력은 어려운 쪽에 있다. 쉬운 데에는 격이 없고 격이 없는 건 흔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돈의 아이러니다. 많기는 어려운데 쓰는 건 쉽다. 많은 돈은 귀하지만 쉽게 쓰는 돈에는 멋이 없다. 2022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럭셔리에 대해 다양한 언어로 정의해왔는데, 그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이쯤 되면 슬슬 도전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럭셔리를 논하는 마지막 퍼즐이 ‘나만의 이야기’라면, 이야기를 찾아 즐기는 데 꼭 몇 억이 필요한 건 아니다. 어쩌면 숨어있을 것이다. 책 한 권이나 커피 한 잔에서도. 신문에 실린 칼럼 한 편이나 어떤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티셔츠 한 장에서도 나만의 호사를 위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돈의 존재감을 폄훼하는 게 아니다. 쓰지 말자는 얘기도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가열차게 벌어서 언젠가 큰돈을 쓸 때 진부하게 쓰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커피 한 잔이나 책 한 권에도 이유와 취향과 근거가 있는 것처럼, 자동차나 집을 살 때도 나만의 무엇이 있는 편이 진짜 호사라는 뜻이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2025년의 일상도 제각각 호사스럽기를. 크고 작은 소비 속에서 너와 나의 럭셔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정우성의 일상과 호사]럭셔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한 땀, 서사](https://img.khan.co.kr/news/2025/01/04/l_2025010301000009800006312.jpg)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처럼 가볍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