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연휴 중 여행지에 도착해 휴대폰을 켠 순간 시작 전에 여행이 끝나버렸다. 여행지에 송출된 유튜브 추천 영상엔 맥없이 멈춘 트랙터의 모습이 비쳤다. 숙소 입실 시간을 가리키는 늦은 오후 무렵, 8시간의 시차를 둔 한국은 한창 칠흑 같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긴 어두움과 냉혹한 추위를 가득 품은 동짓날이었다.
동영상은 윤석열 정부의 농정 실패에 항의하는 전봉준 투쟁단이 내란범 윤석열 체포와 구속에 앞장서겠다며 나섰던 상경 투쟁이 사흘 새 서울 진입을 앞에 두고 남태령의 경찰병력에 가로막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커멓게 캄캄한 밤, 뼛속까지 아리게 하는 강추위가 깜깜한 어두움으로 대신 전달되고 있었다. 가혹한 한파가 대치 상황을 종료시키겠거니 하는 마음에 시청을 시작했으나, 대치가 밤새 이어졌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남태령을 보여주는 영상은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거세질수록 인파가 점점 더 불어나고 활발해지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종일 남태령 시위 현장에 머무르던 한 목격자는 남태령에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나는 기이한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지하철이 끊기는 막차 시간 무렵 고요한 남태령역을 떠나는 사람보다 들어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대부분 농기구가 경찰차벽에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밤늦게 모여든 시민들이었다고. 귀갓길을 포기한 그 시간에 남태령까지 와서 누구 차인지 모르는 트랙터 옆을 지키며 매서운 추위를 함께 견뎠다고. 처음에는 이 투쟁단에 핫팩 정도의 간단한 물품만 왔지만, 이 소식이 어디선가 알려졌는지 먹거리가 오기 시작했고, 보조 배터리가 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투쟁 중인 시민들이 잠시라도 몸을 녹이며 쉴 수 있도록 하려고 대절 버스까지 와서 투쟁 현장 인근에 주차를 해두었다고. 춥거나 힘든 시민들이 잠시라도 버스에 들어가서 쉴 수 있게 되었다고. 후원 물품들을 어떻게 배급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는 이름 모를 시민들이 저마다 와서 물품을 한가득 안고 가더니 척척 옆 사람에게 나눠주었다고. 와중에 쓰레기를 수거하려고 노란 봉투를 들고 다니며 허리 숙여 줍는 시민들도 여럿 있었다고. 이 모든 광경을 보며 외로이 트랙터를 타고 상경한 농민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고맙다며. 더는 외롭지 않다며.
가혹하게 춥고 긴 동지 밤을 농민과 함께 버틴 이들의 열기는 남태령에서 멈춘 엔진을 달구어 결국 트랙터가 경찰차벽을 넘어 서울에 이르게끔 도왔다. 여행을 포기한 채 종일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줄곧 저 남태령의 모습이 내가 머무르는 이 여행지보다 더 새로운 풍경처럼 다가왔다.
남태령 투쟁 이후 농민들은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여하는 다양한 시민과 연대하기 위해 무지개떡을 빚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을 도우려 밥을 지으며 위로를 나누었다. 동짓날 도움 받던 이는 이제 도움 주는 동지가 되어 무수한 남태령 고갯마루를 함께 넘는 연결과 연대의 중심이 됐다.
안락한 은신처에 숨은 내란범의 생떼가 길어지는 와중에도 시민들은 캄캄한 밤거리를 뚜벅뚜벅 함께 걷고 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지와 연대가 끝없이 불어나는 모습을 보며 이 사회에 새로운 동이 트고 있음을 확신했다.

변재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