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어떤 소셜미디어에서 특정한 음모설을 비판했더니 온갖 반박과 비난이 쏟아진다. 교수 맞아? 회색분자! 등등 인신공격은 기본이다. 내가 존중했던 분들도 그 내용에 일리가 있다고 거든다.

음모론이란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공식적·합리적 설명 혹은 해석을 물리치고 그 뒤에 어마어마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주장이다. 주로 권력자가 비밀리에 음모를 통하여 자기의 거대한 이익을 취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속인다는 설이다. 예컨대, 9·11테러가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설, 심지어 1969년에 미국 우주비행사가 달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도 거짓이라는 주장, 제주항공 참사를 ‘특정 정치세력의 자작극’으로 몰아가기 등 중요 사건에는 음모론에 기초한 반론이 생겨난다.

문제는 상당수의 식자도 이런 유의 주장에 쉽게 넘어간다는 점이다. 내가 신뢰했던 어떤 사회운동가는 지금도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미국 정부의 음모에 의해 대중들이 기만당한 수많은 사례 중의 하나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음모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NASA 직원과 관계자 수천 명을 속이거나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특히 우방국들이 그런 쇼에 속거나 눈감아줘야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하기야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결은 조금 다르지만,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라는 중세적 믿음을 수호하는 ‘평평한 지구 학회’(Flat Earth Society) 등의 단체가 있기도 하다. 그들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주장이 비과학적이며 기성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기만이라고 생각한다(미국인 2%인 650만명이 평평설을 믿는다고 한다).

상당수의 음모론은 권력자와 그 측근 엘리트들에 불리한 내용이고 포퓰리즘 요소가 많다. 반대로 권력자에게 유리한 음모론도 적잖다. 극우파와 윤석열 대통령이 심취한 것으로 알려진 ‘부정선거 음모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 경우에나 사실을 무시하고 근거 없는 주장만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나 사회 건강에 위협적이다. 설사 권력 엘리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결국은 힘 있는 자들이 지배력을 마음껏 행사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패배주의적이며 민주적, 과학적 사고를 방해한다.

한국 사회는 음모론에 잘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사실과는 먼 주장으로 밝혀진다 해도 별 사과나 반성 없이 넘어간다. 즉 음모론에 관대한 편이다. 아마도 오랜 시간 축적된 반민주적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고 합리적인 논쟁을 벌이는 공론의 장이 부재하거나 억압되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일 테다. 특히 분단체제 독재하에서 자유롭고 솔직한 논쟁이나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했겠는가?

극단주의자들이 제일 문제지만 ‘의식 있는’ 시민조차도 황당한 음모론을 믿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모든 음모론이 통째로 거짓이지는 않다. 가끔 일부는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얘기한 음모론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다. ‘약자의 무기’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음모론은 구조적 인식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형성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단선적 인과관계를 쉽게 수용하다 보면 세상을 보는 데 있어서 여러 변수/상수들의 복잡한 연관성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단순하고 협량한 시각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학계나 언론에서는 일단 구체적인 사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을 기반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초래한 사회구조를 밝혀내고 복잡한 인과관계를 침착하게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 사람들은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갖게 될까?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위치한 곳과 관계없이 본성적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저급하건 수준이 높건 간에 자기 나름의 답이다. 불행히도 사건 대부분은 복잡하다. 사람들은 단순한 이론, 감정부터 흔들어놓는 선전 선동에 취약하고 또 그것에 쉽게 이끌린다. 음모론은 대체로 사건을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걸 되레 방해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은폐한다.

어떤 정치 지도자가 생전에 제시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은 유명한 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깨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근거 없는 추측과 끊임없는 의심에 기초한 음모론에서 벗어나서 복합적인 사고, 즉 역사적/구조적 조망을 할 수 있는 의식이 이제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Today`s HOT
베네수엘라의 1958년 독재 종식 사건 기념 집회 자이언트 판다를 위해 수확되는 대나무들 터키의 호텔 화재 희생자 장례식.. 브라질의 더운 날씨, 더위를 식히려는 모습
인도네시아의 설날을 준비하는 이색적인 모습 동남아 최초, 태국 동성 결혼 시행
인도네시아의 뎅기 바이러스로 인한 소독 현장 주간 청중에서 산불 겪은 미국을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미국의 폭설로 생겨난 이색 놀이 프랑스 에너지 강화 원동력,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 카스타익에서 일어난 화재, 소방관들이 출동하다. 안티오크 학교 총격 사건으로 미국은 추모의 분위기..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