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와 남진, 그리고 어른

김택근 시인

은퇴 무대에서 나훈아가 왼팔을 들었다. “니는 잘했나?”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12·3 내란사태를 입에 올렸다. 작심했던 모양이다. 얼핏 들으면 정치권을 싸잡아 개탄하는 양비론처럼 들리지만 새겨보면 왼쪽을 향한 조롱이다.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을 단죄함이 어찌 왼쪽·오른쪽 문제인가. 그럼에도 자신의 노래인생을 정리하는, 어쩌면 생의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왼쪽을 힐난했다. 가황이라 불리는 나훈아가 정치적 발언의 파장을 모를 리 없다. 아마 은퇴를 하기 전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나 보다. 자신의 어머니도 형제가 싸우면 둘 다 팼다고 했다. 어머니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훈아는 만인의 어머니가 아니다. 결국 나훈아는 왼쪽이 싫었던 것이다.

나훈아는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다음 공연에서 다시 독설을 날렸다. “안 그래도 작은 땅에서 경상도니 전라도니 XX들을 하고 있다”고 호통쳤다. 정치인들을 향해선 욕을 퍼부었다. “나보고 뭐라고 하는 저것들,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하지 얻다(어디다) 대고 어른이 얘기하는데 XX들 하고 있어.” 나훈아가 언제부터 무엇으로 어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데 연예인은 나이가 있되 나이를 잊고 사는 것 아닌가. 나훈아가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본심이 들켰기 때문일 것이다.

나훈아가 데뷔하기 전에 이미 하늘에 남진이라는 샛별이 떠 있었다. 남진이 ‘가슴 아프게’를 부르면 젊은이들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남진은 수십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남진이 출연한 영화를 봤다. 딱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다. 남진이 매섭게 눈을 뜨고 누군가를 노려보는 장면이다. 그때 객석의 누나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남진의 거침없는 독주에 라이벌이 등장했다. 바로 나훈아였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스타덤에 올라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때 공교롭게도 영구집권을 획책했던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어떤 복선도 없이 노래에 빠져들었던 팬들은 두 사람의 고향을 살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남진과 나훈아는 우리나라 가요계를 양분했던 인기 가수였다. 그런데 나와 내 친구들은 한결같이 나훈아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남진은 전라도고 나훈아는 경상도였기 때문이다. 이게 1960년대 후반 경상도가 아니라 강원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도 나훈아를 좋아한다. 남진은 왠지 간사스럽고 주는 것 없이 밉고 금방이라도 거짓말을 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친구들의 느낌이었다. 반면 나훈아는 투박하고 씩씩하고 남자답고 사나이의 의리를 지킬 것같이 보였다. 약간 소도둑놈(?)을 방불케 하는 나훈아의 그 못생긴(?) 얼굴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 (…) 이쯤 되면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스토리는 연예계의 뒷이야기 수준을 넘어 우리의 정신세계에도 매우 체계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정치학자 전인권 <김대중을 계산하자>)

“그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도 나훈아를 좋아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남진을 여전히 싫어한다’이다. 정말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나훈아는 가황으로 불리지만 남진 앞에는 그 흔한 ‘국민 가수’라는 수식어도 붙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지역감정의 피해자이지만 정도 차이는 있었다. 한때 세상의 모든 인기를 홀로 삼키던 스타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접이다. 물론 자기 관리(선전)에 있어서 남진은 나훈아에 현저하게 뒤졌다. 나훈아는 숨었다가 갑자기 나타나 신비감을 심어주었고, 뜬소문과 스캔들마저 자극적이며 화려했다. 남진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고 아무 데서나 노래했다. 그럼에도 남진의 명성은 지역색에 멍이 들었다고 봐야 한다. 남진이라고 그걸 모를까. 방송에 나와 보란 듯이 고향 사투리를 사정없이 구사하는 것을 보면 괜히 짠해진다.

그렇다고 나훈아가 반사이익을 챙겼다는 말은 아니다. 나훈아도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다. 그럼에도 은퇴무대에서 자신이 지역감정에 갇혀 있음을 폭로해버렸다. 나훈아는 그동안은 구름 위를 걸었지만 이제 땅으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자신이 어른이라 호통을 쳤으니 이제 어른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어른들을 만나본 윤춘호는 “어른과 꼰대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성찰”(<어떤 어른>)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외침도 들어보고, ‘고향역’을 부르며 눈물을 훔친 팬들이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도 살펴보기 바란다. 이런 당부를 아직은 현역인 남진에게도 해본다. 노래도 늙는다.

김택근 시인

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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