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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검증을 해야만 살아남는 지옥

가상의 미국 내전 속 인간의 잔인함을 표현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

가상의 미국 내전 속 인간의 잔인함을 표현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대학 시절, 어느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해방 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의 경험.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장악했던 시골 마을. 늦은 밤에 자고 있으면,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손전등을 비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바라보지만, 불빛 때문에 누구인지 제대로 식별할 수 없다. 그가 묻는다. “너 어느 편이야?” 물어보는 이가 국군인지, 빨치산인지 알 수 없기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반대쪽이라고 말하면, 바로 죽을 수도 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걸린 상황. 가장 두려운 공포 아닐까.

지난달 31일 개봉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에서, 그 시절 기억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만났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가상의 내전이 벌어진 상황을 그린다. 남북전쟁 당시처럼 주들이 나뉘어 싸우는 미국 전역은 수시로 총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이다. 베테랑 종군기자인 리와 초보 기자인 제시 등은 워싱턴에 고립된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

리 일행은 외딴 지역에서 총을 든 군인들을 만난다. 군인들은 누군가에게 살해된 시체들을 파묻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리는 기자 신분을 밝힌다. 하지만 군인의 질문은 하나뿐이다. ‘너희들 미국인이야? 어디 출신이야?’ 리와 제시가 미주리, 콜로라도라고 답하자 일단 넘어간다. 동양인 기자에게 묻자, 그는 홍콩이라고 답한다. 군인은 바로 방아쇠를 당겨 그를 쏴버린다. 미국인이 아니면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듯이.

‘미국인인가?’란 질문은 섬뜩하다. 미국은 영국계,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등 이민자가 세운 나라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법적으로 미국인이다. 하지만 군인의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시민권, 영주권 문제가 아니라 미국인으로서 합당한가, 란 질문이다. 총을 겨눈 군인의 머릿속에는 미국인의 개념이 고정되어 있을 것이다. 백인이어야 하고,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어야 하고, 애국심이 높아야 하고, 지지하는 정당과 사상이 자신과 같아야 하고 등등. 그래서 홍콩에서 온 외신기자는 죽어야 하고, 아마도 리와 제시 역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 자신의 사상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믿는 자들로 가득한 세상을 그린 영화다. 영리하게도 영화는 적대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현직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연합이다. 캘리포니아는 전통적으로 리버럴한 민주당 강세 지역이고, 텍사스는 공화당 우세이며 2021년 낙태금지법을 통과시킬 정도로 보수적이다. 현실에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손을 잡고 연합을 만들 가능성은 없겠지만, 영화에서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연합이 워싱턴으로 진격해 현직 대통령을 공격한다. 대통령이 내세우는 정책이 무엇인지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미국이 분열되었고, 군대를 앞세워 서로 죽고 죽이게 되었다는 상황만을 영화는 제시한다.

그러면 남은 것은, 시민이다. 내전이 벌어지면 군인들은 전투에 나서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외국이 침공했다면 적이 분명하지만, 내전에서는 애매하다. 다수의 사람은 확고한 입장이 없다. 그저 일상을 잘 살면 된다. 다른 입장이라 해서 서로 말살하려고 지독하게 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에도 내전이 없다는 듯 안온한 일상을 치열하게 유지하는 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건물 옥상에는 총을 들고 사방을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를 죽이는 국가는 존재 가치가 없다.

내전, 즉 총을 들고 싸우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의회를 만들고, 투표를 통해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 집단이 모든 시스템을 독점하려 하면 ‘폭력’을 이용한다. 국가가 비상 상황에 처했다며 군대를 동원해 사회를 지배하는 계엄도 자주 쓰이는 수단이다. 반대파를 국가의 적으로 몰아붙여 숙청하고, 의회를 해산하거나 일당독재를 하고, 감시체제를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이 그랬고, 김일성과 이승만, 박정희가 그랬다.

좌우 가릴 것 없이 전체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이고, 사회의 절대악이다. 사회적,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상대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고 협력하는 사회가 합리적이고 올바르다. 내가 누구의 편인지 사상검증을 해야만 살아남는 사회는 지옥이다. 지옥을 만들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 자들은 사회에서 격리되고 처벌받아야 한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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