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국군의날 기념 시가행진행사에서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과 이야기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사법절차가 본격화되면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계엄에 주요하게 관여한 인사들 사이에서 떠넘기기가 시작됐다.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그간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 고유권한으로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다’고 주장하며 한 목소리를 내왔으나, 탄핵심판과 형사재판이 본격화되면 ‘네 탓 공방’이 심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지난 18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차은경 부장판사로부터 비상계엄 선포 직전 국무회의에서 최상목 부총리에게 전달한 쪽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이 쪽지엔 ‘비상입법기구 관련 예산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윤 대통령은 “(쪽지는) 김용현이 쓴 것인지 내가 쓴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차 부장판사가 다시 비상입법기구의 성격을 묻자 윤 대통령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비상입법기구 창설 지시’는 국회 해산 목적과 연결돼 형법상 내란죄 성립 요건인 ‘국헌문란 목적’을 입증하는 핵심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이 대답을 얼버무린 것은 책임을 김 전 장관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 전 장관 측은 이날 “메모 작성자는 김 전 장관”이라며 “김 전 장관은 국회가 완전 삭감한 행정예산으로 인해 마비된 국정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긴급명령 및 긴급재정입법권한’ 행사를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대통령이 최 부총리에게 이를 준비하고 검토하라고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장관 측은 “비상입법기구는 국회 대체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했다.
앞서 윤 대통령 측은 탄핵심판과 관련해 헌재에 제출한 2차 답변서에서 “포고령 1호는 김 전 장관이 종전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있을 당시의 예문을 그대로 베껴 왔다”며 “문구의 잘못을 (윤 대통령이) 부주의로 간과했다”고 주장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에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역시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하거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문란 목적’에 해당할 수 있는데, 그 책임을 김 전 장관에게 돌린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전 장관 측은 “김 전 장관이 직접 초안을 작성했고, 전체적인 검토는 당연히 윤 대통령이 했다”고 말했다. 양측간 이견이 노출된 것이다. 오는 23일 탄핵심판 사건 증인심문에 출석하기로 한 김 전 장관이 헌재에서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린다.
윤 대통령은 여인형 당시 방첩사령관, 이진우 당시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당시 특수전사령관, 조지호 경찰청장 등이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계엄 당시 윤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지시도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군·경 지휘부는 윤 대통령이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끌어내” “2번, 3번 계엄령을 선포하면 되니까 계속 진행해” 등 정치인 체포 지시를 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영장실질심사에서 “내 수사경험에 비춰보면 이들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군·경 지휘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윤 대통령 탄핵심판이 속도를 내고 다음달 초 윤 대통령이 형사재판에 넘겨지면 각자 형량을 줄이기 위한 내란죄 공범들 간 입장 차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비상계엄은 정당하다’며 윤 대통령과 보조를 맞춰온 김 전 장관이 윤 대통령의 책임 떠넘기기에 반발해 입장을 바꿀지 주목된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계엄 세력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있다”며 “탄핵심판과 형사재판에서 공방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