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매화는 눈 속에 핀 것이 제일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나 전기의 ‘매화초옥도’ 등도 설매(雪梅)가 주제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꽃망울을 터트리는 고절한 자태에 모두 탄복했다. 지조, 절개 등의 덕목을 자랑하는 사대부들이 매화에 자신을 투영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양 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며 많은 이들이 칭송하고 추앙했으니, 매화가 사람이었다면, 꽤 젠체하며 거드름 피웠을 게다.

책벌레로 알려진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도 매화를 사랑했다. 그는 관매(觀梅)를 넘어서 직접 만들기까지 했다. 예로부터 종이나 비단, 모시 등으로 가화(假花)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지만, 그는 밀랍으로 매화를 만들고 ‘윤회매(輪回梅)’라 이름 지었다. 꽃잎은 밀랍으로, 꽃받침은 삼록지라는 종이로, 꽃술은 노루 털로, 꽃가루는 부들의 꽃가루 등으로 만들었다. 자칭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던 그는 서얼 출신이라 주요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지만, 실학자 중 가장 박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백과사전식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윤회매의 재료며 형태까지 세밀하게 검토하고 실험하며 완성했다.

“벌이 꽃가루를 취하여 꿀을 빚고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니, 이것을 일러 윤회매라 한다. 대저 꽃이 살아 있는 나무에 피었을 때 어찌 그것이 꿀과 밀랍이 될 줄 알며, 꿀과 밀랍이 벌집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윤회매가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매화는 밀랍을 망각하고 밀랍은 꿀을 망각하고, 꿀은 꽃을 망각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윤회매를 가지고 저 나무 위 꽃에다 비추어 보면, 말 없는 가운데 따스한 윤기(倫氣)가 서로 통하니, 마치 할아버지를 닮은 손자와 같다.”(이덕무, <청장관전서> ‘윤회매십전’)

그가 만든 윤회매는 여러모로 특이하면서도, 그 속에 숨은 뜻과 정신이 지극하다. 고증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덕무의 피를 물려받은 것일까.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물과 현상에 대해 고증하고 설명한 책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은 이규경이 바로 그의 친손자이다. 우주 만물은 끝없이 돌고 돈다. 꽃과 벌과 밀랍의 윤회를 생각하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우리는 부모를 망각하고, 과거를 망각하고, 근본을 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조상들의 은덕과 윤기로 살아간다. 며칠 있으면 설날이다. 조상들께 곡진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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