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지우기’ 무더기 행정명령···취임 첫날 휘몰아친 미국 일방주의

김희진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캐피탈 원 아레나에서 열린 실내 취임식 퍼레이드에서 행정명령에 서명을 한 후 취재진 등에게 보여주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캐피탈 원 아레나에서 열린 실내 취임식 퍼레이드에서 행정명령에 서명을 한 후 취재진 등에게 보여주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 직후 착수한 첫 번째 작업은 ‘조 바이든 지우기’로 요약된다. 그는 가치 기반 동맹과 다자주의 협력 틀을 존중하기보다 미국 우선주의, 일방주의 궤도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완전한 회복”을 위한 것이라며 이날 무더기로 서명한 행정명령은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트럼프 대통령의 1호 행정명령은 바이든 정부의 행정조치 78개를 철회하는 내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실내경기장 캐피털 원 아레나에 모인 지지자들 앞에서 마치 ‘퍼포먼스’처럼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철회된 행정조치에는 인종·성차별 방지, 기후변화 대응 등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 1기 시대와 결별하고 자유주의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온 대표적인 내용이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이전 정부의 파괴적이고 급진적인 행정 조치”라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가입한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는 재차 탈퇴 절차를 밟기로 했다. 4년 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된 쿠바는 백악관 주인이 바뀌면서 겨우 7일 만에 재지정됐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가 취임 연설에서 거론한 단기 의제 대다수는 바이든 시대의 정책을 뒤집는 것에 불과했다”며 “그는 새로운 황금기를 약속했으나 (실제 정책은)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 노선을 실행할 행정명령에도 연달아 서명했다. 이민과 관련해선 멕시코·미국 국경에 대한 비상사태 선포와 국경 장벽 건설 재개, 난민 입국 프로그램 중단 조치 등이 포함됐다. 이에 더해 불법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의 경우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시민권’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 이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러한 출생지주의가 걸림돌이 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다만 출생지주의는 미국 수정헌법 14조에 규정돼있어 법적 논란이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시민단체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는 헌법 개정이 아닌 행정명령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 지나치다”라며 곧바로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 정책을 뒤집고 에너지 개발을 가속하기 위한 조치도 내놨다. 그는 ‘미국 에너지 해방’이란 행정명령을 통해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보급 확대 정책을 폐기하기로 했다. 이어 대선 구호였던 ‘드릴, 베이비 드릴(석유를 시추하자)’을 언급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에너지를 전 세계에 수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이날 승인된 행정명령에 멕시코와 캐나다의 모든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취임 직후 발언 수위를 높여온 ‘관세 폭탄’ 시점이 일단 늦춰지긴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 기관에 미국의 무역 적자와 불공정 무역 관행 등을 조사하도록 지시한 만큼 주변국을 향한 압박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관세 정책이 이날 행정명령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외국 정상들에겐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 의제를 둘러싼 새 행정부 내 의견 불일치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한 자신의 지지자들이 벌인 2021년 1월6일 의회 폭동 사태의 가담자 1500여명을 사면하고 14명을 감형하기도 했다. 폭력을 동반한 의사당 점거로 140명이 넘는 경찰이 다쳤던 사태의 엄중함에 비춰보면 논란이 예상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일괄 사면 조치를 두고 최근 미국 역사에서 가장 분열적 장면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밴더빌트대 교수이자 미국 대통령센터 소장인 니콜 헤머는 “1·6 폭동 가담자에 대한 사면과 감형으로 트럼프는 폭동을 정당화하고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폭력에 대한 대가가 없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지적했다.

그 밖에 이른바 ‘딥스테이트(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정부 내 관료 집단)’로 표현되는 관료주의를 혁파하고, 연방 정부 내 ‘다양성·평등·포용성(DEI)’ 기조를 폐지하는 조치들도 발표됐다. 이날 승인된 행정명령은 대부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부터 강조해오던 내용이지만 지난 4년간 바이든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을 부정하는 성격을 띠는 만큼 미국 내 정치적 분열을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 언론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 중에는 상징적 조치도 섞여 있어 법적 문제가 해결돼야 하는 사항도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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