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4월17일 서울 동대문구 대학가 인근 한 건물 건물주 우편함에 “본인 외 절대 개봉 금지”를 알리는 신용 정보 관련 우편이 무더기로 꽂혀 있었다. 강한들 기자
지난해 서울 동대문구의 한 대학가 일대를 뒤집어놓은 전세사기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건물주는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으며 피해 세입자들은 건물주가 내지 않은 전기요금 등 관리비를 대신 내고 운행이 멈춘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내리며 울분과 원망을 삭이며 살고 있다.
22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건물주 김모씨에 대한 검찰 공소장을 보면 그는 문서를 위조하고 건물을 쪼개 불법적으로 용도 변경하면서 세입자를 등친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는 빌린 돈으로 지은 건물을 담보로 또 빚을 내 건물을 지었고,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을 다른 보증금을 막거나 빚을 상환하는 데 사용했다.
김씨가 이렇게 사거나 지은 건물이 총 10채였다. 피해자는 100여명, 피해금액은 115억원에 달했다. 김씨 본인의 자본금은 거의 없었다. 검찰은 애초부터 전세보증금을 반환할 의사나 능력이 김씨에게 없었다고 보고 있다.
빚으로 빚을, 보증금으로 보증금을 막아온 건물주
김씨는 부동산 임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꿈꿨다. 그는 대지를 사고 건물을 올리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과 개인적으로 빌린 돈 등으로 조달했다. 건물이 완공되면 그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기존 대출금을 정산했다. 세입자에게 집을 빌려주고 받은 임대차보증금도 대출금 상환이나 건축비, 다른 땅 매입비로 썼다. 빚을 갚거나 건물을 짓는 데 쓰고 남은 전세보증금은 ‘돌려막기’에 들어갔다. 새 임차인에게 받은 보증금을 이전 세입자에게 돌려주는 식이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김씨는 건물을 10채나 보유·관리할 수 있었다. 일부 건물은 가족 명의로 매입·관리했다.
김씨는 불법적인 ‘쪼개기’도 서슴지 않았다. 화장실·보일러실을 주택 용도로 바꾸고, 경계벽을 증설해 그 공간에 세입자를 받았다. 이렇게 늘어난 10개 건물의 호실이 580여개에 달했다.
검·경 수사에는 김씨가 담보대출을 일으키기 위해 사문서 위조를 한 혐의까지 포착됐다. 실제로는 전세 6000만원 계약을 했지만, 이를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의 월세 계약을 다수 체결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수사 결과 이런 위조 계약서는 139장에 달했다. 위조계약서로 보증금을 낮춰서 담보 가치가 없는 건물을 가치가 있어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김씨는 새마을금고에서 건물을 담보로 총 5회에 걸쳐 20억원 이상 대출을 받았다. 검찰은 이같은 김씨의 행위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에 해당한다고 봤다.
김씨가 피해자들과 임대차계약을 맺으면서 “주변에 건물을 여러 채 갖고 있어서 보증금 반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거짓말을 한 사실도 공소장에 담겨있다. 실제 김씨가 반환해야 할 보증금 채무와 부동산 담보 대출금액은 각 부동산의 담보가치를 초과한 상태였고, 채무는 약 90억원에 달했다. 검찰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어서 피해자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았지만 이를 계약에 따라 반환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고 보고있다.

서울 동대문구 전세사기 피고인 김모씨가 관리하던 한 빌라 엘리베이터에 21일 ‘운행정지’를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이모씨 제공
울분과 원망이 쌓인 집에서…계속 살아가야하는 피해자들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김씨 소유의 한 건물에서는 수도가 수시로 중단되고, 건물 인터넷 회선 계약이 끊겼다. 건물 세입자 A씨(26)는 “건물 관리비를 어디에 쓴 것인지 의구심이 들지만 전 관리인의 보복이 두려워 고소는 못 한 상황”이라며 “현란한 말에 속아서 김씨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문서위조까지 했다는 걸 알게돼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A씨는 전세사기를 인지하고서도 김씨의 말을 믿고 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해 11월에야 그를 경찰에 고소했다고 했다. 김씨가 소유한 다른 건물 세입자 이모씨(28)는 “건물이 구청 안전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엘리베이터 앞에 ‘운행금지’ 안내가 붙었다”며 “김씨가 체납한 건물 공용 전기세도 세입자끼리 모아서 내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10월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져, 지난해 11월부터 재판을 받고 있다. 김씨는 ‘사문서위조’ 등 혐의는 인정하지만, 보증금을 반환할 의사는 있었기 때문에 사기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가 피해자들이 경찰 조사에서 한 증언의 증거능력에 부동의해, 상당수 피해자가 법정에서 직접 증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리는 다음 공판 기일은 오는 3월4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