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로서 등장하는 기자들
우리의 일은 기록하는 일
유튜브 시청 권한 윤 대통령
레거시 미디어엔 고마운 일
기자가 기자 나오는 한국 영화·드라마를 보는 심정은 의사가 메디컬 드라마, 변호사가 법정 드라마를 볼 때와 비슷하게 불만스러울지 모르겠다. 한국 영화·드라마 속 기자는 열정적으로 정의를 추구하거나, 권력과 밀착해 가짜 뉴스를 쓰거나, 과도한 욕심에 오보를 낸다. 한국 언론에 대한 신뢰가 낮기 때문인지 요즘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유형의 기자가 많이 등장하지만, 가끔은 무능한 검경을 대신해 부패한 권력자에 맞서는 기자도 나온다. 모두 너무 미화됐거나 너무 사악해 단지 극 안에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인물로 보인다. 대다수 사람이 위대한 영웅이거나 사악한 악당이 아니듯, 기자 역시 주어진 조건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보통의 직업인이다.
오히려 미국 영화에서 현실적인 기자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경영과 편집이 충돌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오해하다 이해하는 풍경을 스케치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경쟁사에 ‘물 먹은’(특종 놓침) 걸 만회하려다 단독 기사에 접근하는 <더 포스트>가 그랬다. 양극단화된 사회에서 벌어진 내전을 살벌하게 묘사한 수작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속 기자들도 국적만 미국일 뿐, 한국의 취재 현장 어디선가 만날 법한 유형이다.
<시빌 워>는 내전 중인 미국의 풍경으로 다짜고짜 돌입한다. 왜 내전이 벌어졌는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연합해 정부군과 전투 중이라는 상황이 설명될 뿐이다. 주인공은 궁지에 몰린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수도로 향하는 기자 4명이다.
영화가 전쟁의 피해에 휘말린 민간인,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 전쟁의 향배를 두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이 아니라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미국 내전에 대한 영화의 태도와도 관련 있어 보인다. 제작진은 영화가 특정 정파를 옹호하거나, 현 미국 상황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걸 매우 꺼리는 듯하다. 대통령이 위헌적인 3선에 도전했다는 사실이 암시되긴 하나, 이것이 도널드 트럼프 혹은 그 어떤 역대 미국 대통령을 연상시키진 않는다. 민주당 지지 성향의 캘리포니아, 공화당 지지 성향의 텍사스가 연합해 싸운다는 설정도 <시빌 워>가 친민주당 영화 혹은 친공화당 영화로 분류되는 걸 피하려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영화의 태도에 대한 비판도 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내전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가 “설득력 있게 포장된 비겁함”이라며 “문제가 뭔지 언급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시빌 워>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기자들의 자세에 대한 지적과도 유사하다. 기자는 전통적으로 관찰자였다.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와 그 뒤의 독수리 사진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았으나, ‘아이를 돕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고 비난받다 결국 자살한 사진 기자 이야기는 ‘관찰자로서의 기자’ 논쟁 시 늘 등장하는 사례다. <시빌 워>에서도 기자들은 붙잡혀 고문당하는 민간인을 목격하지만, 사진을 찍곤 별다른 조처 없이 빠져나간다. 혼란스러워하는 신참 기자 제시에게 베테랑 기자 리는 말한다. “우리 일은 기록하는 거야. 의문을 제기하는 건 독자야.”
문제는 이런 태도를 유지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는 데 있다. 한쪽의 목소리를 거세게 전하는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의 시대에 냉정한 관찰자로 남으려는 기자는 흔들리고 비난받곤 한다. 지난 정권에서는 ‘윤석열 검찰의 편에서 조국을 음해했다’고 비난받았다가 이번 정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1년 넘게 수사받는 동료 기자도 있다. 기자의 태도와 일하는 방식은 그대로인데, 상황에 따라 정반대 비난이 쏟아진다. 게다가 대통령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져 내란을 일으킨 혐의를 받고 그 지지자들이 법원에 난입하고 기자를 폭행하고 취재장비를 파손하는 와중에, ‘관찰자’란 무엇이며 그 위치를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지 스스로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레거시 미디어에는 원론적인 길밖에 없다. 지향을 숨기지 않되 그곳으로 향하는 수단은 공정하고 객관적일 것. 때로 흔들리고 실수하더라도 바로잡는 용기를 가질 것. 그런 의미에서 체포되기 직전 “사람들이 유튜브를 보고 레거시 미디어만으로는 판단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 같다”며 극우 유튜브 시청을 권한 대통령은, 유튜브만 보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명확히 증명했다는 점에서, 78년 된 레거시 미디어 종사자에겐 유용하고 고마운 말씀을 남겼다.

백승찬 문화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