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경기 부천의 한 고등학교 축제 퀴즈쇼에 등장한 문제. 엑스 갈무리
#1. 지난 8일 경기 부천의 한 고등학교 축제에서 ‘나락퀴즈쇼’를 진행했다. 이 코너를 준비한 학생들은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운동을 고르시오’라는 질문을 던진 뒤 ‘①3·1운동 ②페미니즘 운동 ③흑인 인권 운동 ④촛불 시위 운동 ⑤동덕여대 공학 반대 시위 운동’을 선지로 제시했다.
#2. 지난 11일 인스타그램에 경기 구리의 한 고등학교 학생이 카키색 베트남군 모자를 쓰고 베트남인을 희화화하는 영상을 올렸다. 이 학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고 복도에서부터 교실까지 양팔을 휘저으며 걸었다. 베트남인들은 틱톡에 퍼진 이 영상을 보고 “무례하다”는 등 댓글을 달았다. 학교에 항의 팩스를 보내기도 했다.
차별과 혐오를 놀이로 삼는 학생들의 행동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학생들이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 혐오를 ‘유머’나 ‘장난’으로 소비하는 현상이 여러 학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학교 교육을 넘어 미디어 환경 개선 등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달부터 이달까지 진행된 축제에서 나락퀴즈쇼를 진행해 SNS에서 논란이 된 중·고등학교는 7곳이다. 남녀공학, 단일 성별 학교를 가리지 않고 문제가 됐다. 지역도 경기 남양주·부천·용인, 울산, 광주, 경북 구미 등 다양했다.
나락퀴즈쇼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이 만든 콘텐츠다. 어떤 걸 선택해도 곤란해지는 답지를 주고 출연자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개그 소재로 삼는다.
학생들이 나락퀴즈쇼를 패러디해 만든 선택지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이 차별을 철폐하고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벌인 운동이다. 독립운동, 민주주의 회복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회운동도 포함돼 있다. 경북 구미의 한 중학교 축제에선 ‘당신이 생각하는 ○○중학교의 슬로건을 고르시오’라는 문제에 ‘딥페이크 전문가’가 선지 중 하나로 제시됐다. 교직원·학생 가릴 것 없이 학교에서도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범죄를 ‘재미’로 소비한 것이다. 베트남인 조롱 영상 또한 인종차별로부터 비롯됐다.
전문가들은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벌어졌던 혐오정치가 교실까지 확산한 점에 주목한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혐오정치는 ‘나보다 약자’라는 걸 집단적으로 놀리고 조롱하며 전능감을 얻는 것을 속성으로 한다”며 “예전에는 ‘일베’ 한다는 걸 입밖에 낼 수 없었는데 ‘일베식 혐오를 하면 낙인찍힐 것’이라는 위협감이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자정 작용을 하지 못하는 교실은 문제를 키운다. 교사들에게 강요되는 ‘정치적 중립’은 교육을 제약하는 족쇄가 됐다. 학부모나 외부인으로부터 민원을 받을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제지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논란에 휘말릴까 교육청도 젠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분위기다.
사회학자인 오찬호 박사는 “교사도 이런 얘기를 하면 피곤한 논쟁이 따라붙어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며 “그러면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이 틀렸고 정제돼야 한다는 압박을 학교에서도 받지 않게 되고 커뮤니티에서 봤던 주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영미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은 “논란거리를 토론시키는 것조차 문제삼기 때문에 교사들도 문제 제기가 들어올까봐 얘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락퀴즈쇼로 비판받은 학교들은 사과문을 내고 성평등 교육,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다만 몇 시간 진행할 것인지,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할 것인지, 특별수업으로 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한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다음달 중순에 새 학년 교육과정 준비가 시작돼 그 때쯤 돼야 계획이 구체적으로 수립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분별한 주장이 쏟아지는 유튜브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는 만큼 미디어 환경에 대한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는 “특별교육 형태로 1년에 몇 시간 하거나 영상을 일방적으로 틀어주는 식의 교육은 효과가 없다”며 “사회가 여성혐오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학교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