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되고 내란 수괴 혐의로 구속 기소된 지금 돌이켜본들 허망한 일이지만 그는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헌법 제69조에 명시된 선서문을 읽으면서 임기를 시작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부터 등장한 대통령 취임선서 문구는 그간 개헌 과정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 국민의 자유 증진, 민족문화 창달 등의 책무가 추가됐지만 헌법 준수와 국가 보위, 국민의 복리 증진이 대통령의 기본 책무라는 뼈대는 그대로 유지됐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 약속을 일거에 배반한 윤 대통령은 12월12일 대국민 담화에서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저는 이에 당당히 맞설 것입니다. 저는 이번 계엄 선포와 관련해서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라고 한 약속마저 차곡차곡 깨트렸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관련 서류 송달을 거부하고 경호처를 방패로 버티기, 헌재 탄핵심판에 출석해 비상계엄 당시 국회의사당에서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기, 지지자들을 선동해 수사기관과 법원 압박하고 공격하기까지 윤 대통령이 보인 행태는 고관대작 출신이건, 시중의 잡범이건 수사기관에 덜미를 잡힌 이들이 애용해온 ‘일도이부삼백’(일단 도망가고, 잡히면 부인하고, 그래도 안 되면 백(background)을 쓴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검사 윤석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검사 시절 피의자의 방어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의자라도 방어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윤 대통령과 그의 변호인, 일부 여당 정치인들이 매일 쏟아내는 궤변과 거짓은 방어권과는 무관한 선전과 선동 그 자체다. 국방부 장관을 제외하곤 그가 임명한 국무위원과 참모 가운데 누구 하나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강행한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려다 보니 억지에 거짓, 음모론을 서슴지 않고 끌어온다. 선거와 언론, 수사기관, 판사와 법원 등 민주주의 제도를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
흥분한 시위대가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해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고 윤 대통령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잡겠다며 활보한 사건은 윤 대통령 무리가 쏟아내는 해악의 시작에 불과하다. 서부지법 난동 사태 직후 한 프리랜서 작가가 극우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와 유튜브 채널 등을 탐구해 분석한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뿌려진 씨앗은 윤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증거를 잡았기 때문에 비상계엄을 일으켰다는 확신으로 자라났고, 거기에 중국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는 음모론과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곧 윤 대통령을 구출하러 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까지 더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을 억압하는 무리들을 공격하는 행위는 정당한 저항권이자 민주주의를 지키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게 그들이 신봉하는 서사이다.
무엇 하나 증거로 드러난 게 없고, 논리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 무리가 쏟아내는 거짓과 선동은 인터넷과 유튜브에서 떠돌던 음모론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서부지법에 난입했다가 현행범 체포된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20~30대라는 사실은 이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들이 기존에 알려진 이른바 ‘태극기부대’에 국한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 윤 대통령 무리는 탄핵심판을 심리 중인 일부 헌법재판관에 대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탄핵심판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헌법재판관을 공격하고 나섬으로써 사실상 법치를 부정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극단적인 반공주의, 국가주의,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한 파시즘이라고밖에 형용하기 어려운 신념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과 형사재판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윤 대통령 무리가 쏟아내고 있는 해악은 유독성 폐기물처럼 남아 우리 사회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앞장서서 허물어버린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하는 일도 지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윤 대통령의 내란죄 혐의보다 더 심각한 죄악이다.

김재중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