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초기화](https://img.khan.co.kr/news/2025/02/02/l_2025020301000012800002581.jpg)
네가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이건 달력이야!라고 말하자 시인은 그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어느 사이 “빈집이었”고, 엄마와 개는 보이지 않았고, 너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마당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뒷문이 열려 있는 빈집에서 시인은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천천히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잠이 쏟아졌다. 꿈속에서 넘쳐나는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열두 겹의 새로운 마음들로 1년을 채우기 위해 쓴다. 쓰면서 지워지는 세계. 시인은 다시 쓰기 위해 그동안 쓴 것들을 지운다. 백지의 영혼이 되어,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을 새롭게 부른다. 텅 빈 몸, 텅 빈 영혼이 되어 겨울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열두 개의 나침반을 들고 폭설이 내린 길 위에 새 발자국을 찍는다. 다시 눈이 내린다. 백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