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세계

최성용 사회연구자

2024년 12월3일 이후 두 달이 지났다. ‘내란성’ 스트레스, 불면증, 우울증 등 온갖 질환을 겪다가 다들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온 듯하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윤석열은 구속기소됐을 뿐 탄핵심판과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윤석열이 의회 무력화에 실패한 이후, 현재 내란 세력의 칼끝은 사법부로 이동했다. 윤석열 지지자들은 법원을 침탈했다. 여당 의원들은 연일 헌법재판소와 사법부를 향해 색깔론을 쏟아낸다.

이것은 내전이 아니다. 내란이다. 내전은 한 국가 내에서 정규군을 포함해 조직화된 무력집단 간에 벌어지는 무력 갈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극우세력만이 군인과 민간인을 동원해 무력으로 의회와 법원을 침탈했을 뿐이다. 헌법과 법절차를 무시하고서 의회와 법원, 선관위와 헌재라는 주요 헌법기관들을 모조리 반국가세력이라 선동하는 것도 오직 극우세력뿐이다.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내란의 장기화’를 획책하고 있다. 지금 과연 누가 진정 반국가세력인가?

윤석열은 집권 초부터 ‘반국가세력’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이처럼 정의가 모호한 개념은 자의적으로 사용된다. 과거 권력은 평범한 시민에게 손쉽게 ‘빨갱이’란 딱지를 붙였고, 그러면 어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정말 빨갱이인지, 빨갱이가 대체 무엇인진 중요하지 않았다. 권력이 임의로 누군가를 빨갱이라 지목하면 빨갱이가 생겼고, 그 근거는 조작됐다. 실체도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설정된 반국가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부정선거론에 중국 배후론까지, 음모론과 가짜뉴스로 반국가세력을 조작해내면 그뿐이다. 그 극단적 결과를 우리는 이미 지난해 12월3일 목도했다. 계엄 포고령은 계엄 이유가 반국가세력의 체제전복 위협이라 적시했다.

나는 여당 의원과 극우집회 발언에서 계엄의 밤을 떠올린다.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기어이 짓밟고 무너뜨리겠다는 저 의지 앞에 무력해진다. 사실 두 달 넘게 지속되는 이 내란에 피곤하고 지친다. 그러다 토요일마다 집회를 가면 묘한 위로를 받는다. 뉴스는 매일 저주와 증오로 가득한 선동의 말들을 쏟아내는데, 집회에 가면 딴 세상에 온 기분이다.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 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놀라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따뜻하게 데워진 쌍화탕이 있었다. 선결제, 커피차, 기부 등 구체적인 사랑이 집회를 지키고 있었다. 수많은 이주민, 트랜스젠더, 장애인, 노동자가 제 정체성을 드러내며 발언했고 박수를 받았다. 서로에 대한 사려 깊은 돌봄과 환대가 사람들 사이에 흘렀다. 검은 패딩을 입은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인 가운데 있으니 펭귄이 된 것처럼 춥지 않았다. 응원봉을 들고 춤추는 행진에 신이 났다. 이 속에 있으면, 이들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문득 1970~198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떠올렸다. 여공들은 노조를 지키고자 최일선에서 엄혹한 박정희 정권과 대결했다. 왜 그랬을까? 대체 노조가 뭐길래. 고향을 떠나 상경한 10·20대 여성들은 지인도 없는 낯선 곳에서 휴일 없이 매일 12시간 이상 일했다. 그러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노조가 만들어지자 여공들은 글자를 배우고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사장과 달리 조합원들은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함께 소풍 가는 친구가 생겼다. 노조는 자신을 사람답게 대우하는 ‘다른 세계’였다. 아마도 여공들은 그 다정한 세계를 지키려고 그토록 용감해졌던 것 아닐까. 지금 응원봉을 든 여성들처럼.

어느새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이 ‘세계’가 되었다. 저 폭도들의 폭력적 세계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다정함과 배려로 쓰인 세계. 자신의 서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써내려가는, 대선의 시계와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세계. 나는 이 세계를 지키고 싶어 매주 집회에 나간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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