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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시도(39)는 경남 산청의 간디고등학교 3년차 선생님이다. 간디학교는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며 당당하게 나의 길을 찾아가는 작은 학교’라는 슬로건을 건 대안학교다.

‘남학생들은, 남자들은 왜 여성혐오가 담긴 욕을 할까. 교사라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더 깊이 알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기도, 답답하기도 했던 시도는 2023년 학교에서 남학생들의 페미니즘 동아리 ‘도전한남’을 만들었다. 6개월 후 여학생들의 페미니즘 동아리 ‘여유림’도 만들어지면서 간디학교에서는 두 동아리가 함께 토론 수업을 한다. 몇 차시의 수업보다 더 나아간 동아리 속 토론 수업에서는 어떤 교육이 이뤄질까. 대안학교 간디학교의 활동은 많은 일반 학교에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시도 선생님의 성평등 교육 이야기를 4회차의 ‘입주자 프로젝트’ 연재로 싣는다. 1회 연재는 ‘왜 청소년에게 성평등 교육이 필요한가’이다.


플랫 입주자프로젝트 4. 쌤 페미예요?

플랫 입주자프로젝트 4. 쌤 페미예요?

오래 전이다. 복도에서 남자 청소년끼리 서로 장난치며 “야 이 미친년아”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듣기 거북함과 동시에 이상했다. 분명 남학생들밖에 없는데 왜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년이라고 부를까. 내가 못 본 여학생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너무 센 욕이 아닌가? 서로의 성별을 모르진 않을 텐데 왜 ‘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해답을 찾은 건 페미니즘을 더 많이 공부하게 된 이후다. 청소년들은 ‘놈’보다 ‘년’이 훨씬 모욕적이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안다. 상대방이 남성임에도 남성임을 박탈할 수 있는 말, ‘넌 남자답지 못해, 여성적이야’라는 메시지는 남성들의 커뮤니티에서 모욕을 주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이때 ‘여성’은 남성보다 부족한 것이고, 열등한 것이고, 모자란 것이다. 청소년들은 누구의 개입도 없는, 장난을 빙자한 이런 말들로 무엇이 잘못된 줄 모른 채 여성혐오를 학습한다.

청소년 모두가 성평등을 지구온난화, 인종차별만큼 보편적인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남자만 학교에 갈 수 있다면, 혹은 여자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부당하다 저항하며 평등을 외칠 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집안일하는 비율을 물어보면 절반 이상이 엄마가 맡아서 한다고 손을 든다. 동시에 엄마가 일도 하고 살림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상 속 우리가 하는 대화와 생각이 얼마나 성평등하지 않은지는 모른다. 그것이 여성혐오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도 말이다.

📌[플랫 입주자 프로젝트 - 쌤 페미예요?]①선생님이 말하는 청소년에게 성평등 교육이 필요한 이유

오랜 시간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역할과 능력을 제한하고 고정관념 속에 여성을 가두었다. 모임에서 남성이 회장을 하고 여성이 총무나 부회장을 하는 관습, 대표가 여성이라 감정적이라는 편견의 말, 교실에서는 여학생들이 수학을 못 한다고 낮춰 보고, 뒤에서는 얼굴이 못생겼다고 평가하는 현상도 전국적이다.

우리 안에 스며있는 성차별을 인식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관점이 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다양한 학문적 계보와 담론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성별로 인한 불평등과 차별을 없애고, 모든 성별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는 사회를 추구한다. 가부장제, 성별 고정관념,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구조를 분석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 이런 관점과 실천은 우리 안의 차별과 혐오를 인식하는데 균형 잡힌 틀을 제공한다.

신학기에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을 하면 일부 학생들은 대뜸 ‘그거 여성우월주의 아니에요? 남성 역차별주의 아니에요?’라고 대답한다. 소셜미디어(SNS)나 유튜브에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여학생은 “성역할이나 성차별은 엄마, 아빠 세대에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제한된 경험 속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페미니즘은 특정 성별을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별에 상관없이 존중받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대답한다. 법적으로 성평등이 진전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임금 격차, 성폭력, 돌봄 노동의 불평등한 분배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또 묻는다.

“쌤, 페미예요?”


청소년들에게 ‘페미’는 두려움의 단어다. ‘페미가 묻어 있다’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페미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낙인 찍는다. 그래서 나 또한 선뜻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두렵다. 동시에 걱정한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학생들이 교사의 긍정적 영향을 거부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교육적 효과를 떨어뜨리게 될까봐서다.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라고 대답한 청소년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탐구해 봤을까? 유튜브나 SNS의 쇼츠나 댓글이 아닌, 신뢰도 높은 자료를 통해 페미니즘을 접했을까?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 학생들이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 학생들이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두려워하고 낙인찍는다. 이러한 편견은 적극적인 배움으로 뚫어야 할 부분이다. 편견을 방치하면 무지가 굳어져 진실이 된다. 이 편견이 강화되어 자신의 가치관이 되어버린다. 이것을 막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작년 말 딥페이크 범죄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N번방 사건의 충격이 컸고 이런 문제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학별로 딥페이크 범죄가 있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10대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수업 때 한참 대화를 나눴다. SNS 사진을 내리는 여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며 어디까지 잘못되어야 변할까 절망스럽기만 했다. 일부 남학생은 불법 촬영, 화장실 ‘몰카’가 한참 문제 되었을 때 별것 아닌 것으로 난리 친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학생들의 밤거리에 대한 공포를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고 되레 화내고 조롱하기도 한다. 못생겼으니까 안 건드린다고 말이다. 그리고 뒤에서 ‘얼평’을 한다. ‘걔 진짜 못생기지 않았냐’며 깎아내리고 ‘우린 그보다 낫다’며 또래 집단의 돈독함을 만들어 낸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대중문화 속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비하하고 조롱하는 여성혐오가 결국 딥페이크나 N번방 같은 범죄로 드러난다. 이것을 또래의 놀이 문화로 인식한다.

이 절망을 다시 마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학교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학급 회의도 따로 운영하며 서로 대화하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 젠더 갈라치기 전략의 결과이자 승리다. 아동·청소년기에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있다. 나에 대한 탐구, 타인에 대한 탐구와 호기심, 이를 기반으로 관계 맺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온기를 나누는 것이다. 같음과 다름을 확인하며 민주적이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서로 신뢰할 수 있다는 긍정적 경험을 나누고 존중과 환대를 배우는 것이다. 서로를 적대적 대상으로 보거나 성적 대상으로만 환원하는 지금의 현상은 너무나 위험하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함께 왜곡된 섹슈얼리티로 건강한 관계 맺기를 경험하지 못한 결과다.

유네스코에서 제시하는 포괄적 성교육에서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모두 다룬다. 성평등에 기초해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젠더에 대한 이해, 인간의 신체와 발달, 성적 행동과 성건강에 대해 점진적으로 교육하고 배운다. 단순히 ‘무엇을 하라, 하지 마라’의 가이드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필요한 학습이 범교과적으로, 연령대별로, 절실하게 필요하다.

📌[플랫]‘금욕적 성교육’이 만든 ‘성교육 과외’, ‘포괄적 성교육’으로 바뀔 이유

“저는 일찌감치 저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고 나서 생긴 고민들이 있어요. 페미니스트라면 굳이 남자랑 잘 지내려고 딱히 노력할 필요 없는데 나는 남자인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그 사이의 간극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얘들이랑 수다나 떨고 싶어서 왔어요.”

“제 주위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나쁜 거라고 혐오 발언을 많이 하는데 저는 혼자 페미니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때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학교 와서 내가 이상한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들어오게 되었어요.”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온 청소년들의 말이다. 두 사람은 남자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싶은 솔직한 마음을 직면하고, 각종 혐오 속에서도 내 안의 상식과 기준을 두고 사고할 힘을 가졌다. 세상의 말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가는 청소년들 곁에, 우리는 어떤 어른으로 서 있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하고 다뤄야 할지 몰라 침묵하거나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 보면 좋겠다. 페미니즘을 배우고, 가르치고, 이야기할 용기를 함께 내고 싶다.

▼ 시도 간디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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