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미 국제개발처(USAID) 본사 앞에서 ‘USAID는 반드시 남아야 한다’, ‘USAID를 살리고 생명도 살려라’ 등의 손팻말을 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구조조정 조치를 규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외 원조를 동결한 것이 세계 각지의 권위주의 정권을 이롭게 하리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게 된 민주주의 옹호 단체는 자금난으로 활동을 축소하고 있으며, 권위주의 정권은 이를 환영하고 나섰다.
4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미국이 그동안 펼쳐온 해외 원조에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풀뿌리 단체에 대한 지원금이 포함돼 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 선거 사기 감시 단체, 쿠바와 중국의 민주주의 활동가, 벨라루스의 망명자 단체 등이다. 올해 미국 의회가 벨라루스, 중국, 북한, 러시아 등 8개국에서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지원 정책에 책정한 예산은 6억9000만달러(약 9962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취임하면서 해외 원조를 90일 동안 동결했다. ‘미국 우선주의’ 정신에 비춰 해외 원조도 미국을 더 강하고 번영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연방정부를 간소화하겠다며 미 국제개발처(USAID)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USAID는 미국의 해외 원조를 전담하는 기관이다. USAID 직원들은 반강제적 퇴사와 해고의 선택지에 놓인 상황이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조치가 세계 각국의 권위주의 정권에 뜻밖의 호재가 되리라는 점이다. 그동안 지원을 받았던 단체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심각한 정치적 후과로 이어질 수 있다.
벨라루스 망명자를 돕는 ‘어니스트피플’ 측은 “직원 15명을 해고하고 사무실 임대 계약을 종료해야 한다”며 “이는 단지 직장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과 러시아의 선전과 맞서는 전투에서 지는 것을 뜻한다”고 밝혔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치하에서 선거 감시 운동을 벌여온 한 활동가 역시 수십명을 내보냈다며 “트럼프는 마두로가 못했던 일을 해냈다. 바로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AP는 “일부 공화당원은 (해외 원조 동결이) 미국의 전략·안보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미국과 대립하는 각국 권위주의 정권은 반색을 표했다. 디오스다도 카베요 베네수엘라 내무장관은 그동안 USAID가 야당에 줬던 지원이 “부패의 블랙박스”라며 이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의 아들이 소유한 니카라과 방송은 “트럼프가 테러리스트의 수도꼭지를 잠갔다”고 보도했다. 이란 매체도 미국이 자신의 편을 “휴지처럼 버렸다”고 조롱했다.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가 자신이 그와 양자관계를 재설정한 덕분이라고 자찬했다.
인권·민주주의 분야뿐만 아니라 보건과 복지 분야에서도 미국의 지원 동결이 실질적 타격을 낳으리란 우려가 나온다. 유엔인구기금(UNFPA) 아시아태평양 사무소는 미국이 계속해서 지원하지 않는다면 올해부터 2028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산모 1200명 이상이 사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각각 900만명, 120만명 이상이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된다고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