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미선씨가 지난달 31일 밥연대를 위해 찾은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 농성장 인근에서 경찰에게 “밥통에 뭐가 들었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X 계정 @YOJIGKYOUNG 갈무리
“밥통 안에 뭐 들었어요?”
전국 각지 투쟁 현장에 밥을 나누러 다니는 성미선씨는 지난달 31일 경찰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성씨는 설 연휴 기간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서울 중구 한화그룹 본사 앞에 차린 농성장에 밥을 나눠주는 ‘밥연대’를 하러 갔다. 농성장 앞에 차를 멈추고 트렁크에서 밥통을 내리는 순간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어디 가세요?” “밥통 안에 뭐 들었어요?” 쏟아지는 질문에 성씨는 당황했다.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서 밥통 뚜껑을 열었다. 시래기 밥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경찰은 밥통 속 내용물을 확인한 뒤 상부에 전화를 걸었다. “밥통을 들고 왔는데 반입을 해야 할까요, 제지해야 할까요?” 경찰은 통화 상대방으로부터 허락을 받고서야 밥통을 농성장으로 들여보냈다. 농성장에 있던 청년들은 “이제 밥통까지 검열하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성씨는 “여지껏 전국을 다니면서 ‘밥통 안에 뭐가 들었냐’는 질문은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성씨가 경험한 웃지 못할 경찰과의 신경전은 최근 소규모 농성장이나 기자회견에서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초유의 서울서부지법 난동·폭력 사태로 신경이 곤두선 경찰이 강경 대응 기조를 세운 영향이다. 극우 세력과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시위가 이어지면서 공권력의 긴장도가 높아진 측면도 있다. 경찰은 서부지법 사태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이 열릴 때마다 기동대 경력 3500여명을 헌재 인근에 배치해왔다.
극우 세력과 국민의힘 등이 서부지법 사태를 두고 “경찰 대응이 미온적인 탓”이라고 부리는 억지도 경찰 부담을 키우고 있다. 일선의 경찰은 고충이 커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목소리를 낼 공간이 위축되는 상황이다.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한 아버지의 산업재해 사고 1심 선고를 앞두고 서부지법 앞에서 4주간 1인 시위를 했던 문혜연씨(33)는 서부지법 난동이 벌어진 지난달 19일 이후 법원 정문에서 1인 시위를 할 수 없었다. 문씨는 ‘이전부터 해오던 집회인데 왜 내가 옮겨가야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저희 좀 도와달라”는 경찰의 말에 법원에서 100여m 떨어진 한 공원으로 1인 시위 장소를 옮겼다. 시민단체 활동가나 시민들이 다가가 말만 걸어도 경찰은 “붙어 있지 말고 떨어져라” 제지했다고 한다. 다수가 몰려 있으면 집회 신고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법원 난동 사태 이전엔 없던 일이었다.

서울 마포구 건설현장에서 안전모 등 안전장비 없이 추락해 사망한 고 문유식씨의 딸 혜연씨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지난 3일 주한미얀마대사관 무관부 앞 시민단체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4년간 같은 장소에서 매년 했던 기자회견을 경찰이 제지했다. 경찰은 ‘미얀마 시민들과 함께 하겠다’라 적힌 손팻말을 문제 삼았다.
그간 같은 장소에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쳐온 활동가들은 “외교기관 100m 이내에선 손팻말을 들어선 안 된다”며 막아선 경찰 대응에 당황했다. 그간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선미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회견에는 통상 현수막과 앰프, 손팻말을 준비한다”며 “지금껏 활동해오면서 경찰이 손팻말을 들지 못하게 하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결국 이날 회견은 손팻말 없이 진행됐다. 활동가들은 국내 미얀마인들이나 미얀마에 남은 그들의 가족에게 악영향이 갈까 걱정해 한발 물러섰다.
신고가 필요한 집회와 그렇지 않은 1인 시위, 기자회견을 구분하는 법적 기준이 모호해 경찰의 자의적 통제가 이뤄진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간사는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경찰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이것이 선례처럼 남아 다른 현장에서 이용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소속 활동가들이 지난 3일 서울 성동구 주한미얀마대사관 무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기 전 손팻말 사용 여부를 두고 경찰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김송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