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은 달라야 한다

구혜영 정치부문장

안토니오 그람시는 대혼란기를 인터레그넘 개념으로 설명했다. “위기는 정확히 말하면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터레그넘(권력의 궐위와 헌정질서 공백)에서는 극히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출연하게 된다.”

그람시의 진단이 타당하다 해도 12·3 불법계엄 후 우리의 지난 두 달은 단순한 궐위와 공백의 시간이 아니었다. 낡은 것(수구 보수)의 소멸은커녕 그보다 더 낡은(극우 보수) 것의 등장이라는 위기에 직면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대통령 윤석열은 끊임없이 법 집행을 거부하더니 법원에 구속 취소를 청구했다. 국민의힘은 대통령을 구속기소한 법원에 유감을 표한 것도 모자라 연일 헌법재판관을 향해 색깔론 공세를 펴고 있다. 국회에 폭력의 상징인 백골단을 세운 것도 이들이다. 지지자들은 1·19 법원 침탈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며 집권 세력의 법치 농락에 공조했다.

이에 더해 8년 전 탄핵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전 대통령 박근혜 탄핵 사유를 도덕성 문제로 봤던 보수가 이번엔 ‘계엄은 순교’라는 식의 이념전을 불사하고 있다. 그때는 사분오열했지만 이번엔 분단, 지역, 종교를 동원해 총결집했다. 그 결과 대통령 윤석열의 지지율은 30%대,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다. 내란범을 인정하며 정권재창출을 거론하는 이 기이한 현상을 민주당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2017년 탄핵 땐 대통령만 물러나면 저절로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았다.”(민주당 중진 의원) “8년 전 대선에서 보수는 탄핵이라는 치명상을 입고도, 복수의 후보군이 출마하고도 득표율 총합 40%대였다. 극우 주류화라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이 똘똘 뭉친 지금, 진보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을까.”(수도권 의원) 각각의 학습효과는 다르지만 큰 틀에선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탄핵과 미래를 동시에 추진하지 않으면, 더 넓은 연대로 결속하지 못하면 정권만 바뀔 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가장 큰 책임은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에 있다. 과연 민주당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권 교체를 향하고 있는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윤석열 탄핵이 가시화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대선은 ‘계엄 대선’이다. 불법계엄을 일으킨 대통령을 단죄하고, 그 대통령을 옹호하는 세력을 플레이어로 인정하면 안 되는 대선이란 뜻이다. 이걸 막지 못하면 과거사 청산은 고사하고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할 뿐이다. 현재 집권세력의 기세면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해도 불복, 부정선거 음모론이 고개를 들 것이다. 압도적으로 이겨야 퇴행을 막고, 집권해도 강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려면 불법계엄에도 정권재창출을 지지하는 세력을 30%로 묶고 내란에 반대하는 시민 70%의 마음을 모두 끌어와야 한다. 이는 기존처럼 진보 보수 대결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로 전선을 넓혀야 한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민주주의 연대가 좋겠다. 이 연대가 결속력을 가지려면 다름을 껴안을 수 있는 역량과 용기가 필요하다. 당내에선 이견 그룹을 포용하고 당 밖에선 남태령, 여의도 광장에서 경험한 연대를 받아 안는 것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는 초일회와의 만남도 주저하고 있다. 다른 의견이 나오면 측근 의원들은 “척결”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강성 지지자들은 “짐싸고 떠나라”며 충성 경쟁을 불사한다. 권력획득이라는 뻔한 목표가 정권 교체의 유일 과제가 아니라면 이 대표는 스스로를 포함한, 당내 민주주의 연대를 가로막는 반민주적 행태와 단호히 결별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비(반)이재명의 민주당’은 어떤 새로운 언어로 연대를 말하고 있나. 비슷한 시점에 일제히 이 대표 견제에 나선 모습이다. 심지어 국민경선 추진단 구성도 흘러나온다. 현재 민주당 경선룰로는 이 대표를 이길 수 없으니 당 밖에서 국민경선으로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취지다. 계엄 대선 국면에서 3당을 만들자는 얘기인데 현실화하려면 내란세력을 정치 플레이어로 인정해야 한다. 이번 대선 성격을 망각한 구상이다. 당내 비이재명계 주자군은 다들 국정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다. 1위 주자를 때리며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관성적 욕심을 벗어나 단절해야 할 과거, 성찰해야 할 현재, 만들어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새로운 언어로 경쟁하고 연대해야 다음 기회가 있다.

대선에선 실용주의에 대한 유혹이 크다.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고수해야 할 자신의 이념이 있다 해도 그 자체를 추구하기보다 스스로의 가치를 실현하고 공동체에 유익한 것을 찾기 위한 방법”을 실용주의라고 했다. 진보(보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려 깊음을 실용주의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대표는 “민주당의 가치는 실용주의”라고 했다. 금투세 폐지, 가상자산 과세 유예, 주52시간 노동 문제를 뼈대로 한 반도체 특별법을 실행하는 게 민주당의 가치란 말인가. 동의하기 어렵다. 이 대표의 실용주의는 고수하려는 이념이 무엇인지, 민주당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려 깊은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진보도 보수도 환영하지 않고, 외연 확장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우경화 논란만 커지는 걸 보니 이재명표 실용주의는 강한 이미지를 보완하는 절충, 중도를 양극화 정치의 부산물로 보는 낡은 언어에 가깝다.

구혜영 정치부문장

구혜영 정치부문장

다시 강조하지만 계엄 대선의 정권 교체는 새로운 언어로 호명해야 한다. 낡은 언어로 만들어지는 새 세상은 더 이상 없다. 이번은 반드시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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