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봉쇄한다고 명품백이 작은 파우치 되나

안홍욱 논설위원

12·3 내란의 밤, 윤석열이 경찰을 투입해 언론사를 봉쇄하고 소방청을 통해 단전·단수하라고 이상민(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에 지시했다. 대상은 경향신문·한겨레·MBC·JTBC 등 언론사 4곳과 여론조사 꽃, 결행 시간은 ‘자정’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런 조치를 문건으로 전달받은 이상민은 포고령 발령 직후 경찰청장과 소방청장에 전화했고, 소방청장은 소방청 차장에게, 차장은 서울소방재난본부장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검찰의 윤석열 공소장에 적시된 내용이다.

비상계엄 소식에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들, 신속하게 계엄을 해제한 야당 의원들이 아니었다면 윤석열은 국회를 장악한 뒤 비판 언론들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이를 본보기 삼아 다른 언론사를 겁박했을 것이다. 무장 계엄군이 국회 본청을 헤집고 다니던 모습과 함께 한동안 박제될 기억이다.

윤석열 계엄 포고문 세번째 항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부정이다. 전두환 독재도 차마 언론사의 전기와 물을 끊지 않았는데, 윤석열이 감히 하려고 한 것은 증오와 보복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집권 2년 반, 집요하게 언론 장악을 시도했고 비판 언론에는 적대감을 표출했다. ‘바이든 날리면’ 보도에 전 국민 청력 테스트를 하더니, ‘황상무 회칼 테러’ ‘런종섭’ 같은 불리한 보도는 가짜뉴스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김건희·명태균 사태는 방어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무능·무지·무책임한 윤석열은 ‘잘하고 있다’고 세뇌시켰다. 저조한 국정 지지율, 잇단 선거 참패는 비판 기사와 이를 게재하는 포털사이트 때문이라고 여겼다. 윤석열 눈에 이들은 여론조작·허위선동을 일삼는 ‘반국가세력’이었다. 스스로 만든 허황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는 리플리 증후군을 겪고 있는 듯하다.

윤석열은 계엄이 성공했다면, 아마 기상천외한 조치로 언론이 자신을 찬양토록 했을 것이다. 전두환식으로 하면, 시시콜콜한 보도지침을 주고 모든 기사를 사전 검열했을 수 있다. 김건희가 받은 명품백은 ‘작은 파우치’로 둔갑하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실명 없이 ‘한 야당 인사’로 표기됐을 수도 있다. 지침을 어기는 언론인은 모처로 끌고 가 윽박지르고, 당시 언론기본법을 제정한 것처럼, 말 듣지 않는 언론사는 정부가 자의적으로 등록을 취소했을까. 끔찍하다.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었을 법하다. 언론의 암흑기인 전두환 시절 정권에 과잉 충성해 사세를 급속히 불린 어떤 신문사처럼.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언제 어디서든 뉴스를 모바일로 전송하는 디지털 시대다. 박정희 사망 다음날인 1979년 10월27일 시작된 계엄령이 1981년 1월25일 해제될 때까지 1년3개월간 계엄사는 보도검열부를 설치해 108만3696건의 기사를 사전 검열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를 18개로 줄였지만, 지금은 일간·주간·인터넷 신문을 포함하면 4084개(2022년 기준, 한국언론진흥재단)가 넘는다. 뉴스는 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유튜브는 어떻게 막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어찌할 것인가.

무엇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 의식과 민도가 높아졌다. 국민은 더 이상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가면 쓴’ 윤석열에 대한 이야기를 다수 국민들이 믿겠는가. 윤석열이 언론을, 여론을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망상에 빠진 전체주의자일 뿐이다. 요제프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 독일의 행태다.

윤석열이 끝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은 그걸 옹호하며 혹세무민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계엄에 대한 진솔한 사과 없이 “계엄으로 국민들이 민주당의 국정 마비 행태를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윤석열의 옥중 궤변을 퍼나르고, 극우세력을 동원해 ‘윤석열 방탄’에 나서고 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또 다시는 윤석열 같은 이가 나올 수 없도록 윤석열과 그 동조세력의 패악은 모두 기록해 역사에 남겨야 한다.

지금 언론이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진영 갈등, 이념적 분열이 깊어지는데 언론이 과연 합리적 공론을 창출할 수 있도록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권력을 견제하는 언론의 근본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 민주주의 기초인 언론 자유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 국민의 알권리와 말할 권리를 짓밟는 그 어떤 시도도 경계해야 한다. 언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다.

안홍욱 논설위원

안홍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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