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스맨
피터 S. 굿맨 지음 | 김하범 옮김 | 도서출판 진지 | 544쪽 | 3만3000원

2018년 1월13일(현지시간) 스위스 베른에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스위스 다보스는 인구 1만명 남짓한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해마다 1월 말이면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정치 지도자와 기업 최고경영자(CEO)부터 유명 학자와 언론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파워 엘리트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이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보스맨’은 2004년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고안한 표현이다. ‘다보스포럼’이라고도 불리는 WEF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억만장자들을 지칭한다. 다보스포럼을 수차례 취재한 뉴욕타임스(NYT) 기자 피터 S. 굿맨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야수’다. “그것은 희귀하고 놀라운 생명체로,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거침없이 공격하는 포식자이며, 다른 사람의 영양분을 빼앗는 동시에 모두와 공생하는 친구로 위장하여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책 판매에서 시작해 지금은 4억종 이상의 상품을 판매하는 아마존은 세계화된 분업 체제와 물류 혁신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생산비가 떨어졌고 인터넷과 글로벌 뱅킹은 물리적 거리의 장벽을 크게 무너뜨렸다. 아마존 창업자로 다보스포럼 단골 참석자인 제프 베조스의 재산은 2007년 한 해 동안에만 40억달러 가까이 증가했다.
반면 그래닛 시티 철강 노동자 댄 시몬스는 미국 제철업계가 24시간 공장을 가동하는 중국산 제품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쇠퇴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1999년부터 2011년 사이에 중국산 제품 수입 여파로 사라진 미국 제조업 일자리는 100만개에 달한다.
저자는 시몬스 같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은 것은 세계화 때문이 아니라 세계화의 과실을 독점한 억만장자들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래닛 시티 제철소를 소유한 대기업 U.S 스틸은 2016년 4억40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지만 주주들에게는 3100만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했다. 그해 U.S. 스틸 CEO 마리오 롱기가 회사에서 받은 돈은 1090만달러에 달했다. 기업들은 “어떤 일이 닥쳐도 금고에 돈을 더 쌓을 방법을” 찾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실직, 파산, 우울증”이 남았다.
억만장자들의 이윤 추구 본능은 스웨덴처럼 탄탄한 복지국가 시민들의 삶도 흔들어 놓았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은 2016년 스웨덴 최대 상장 부동산 회사인 D. 카네기 앤 코를 헐값으로 인수한 뒤 이 회사가 관리하던 아파트의 임대료를 올렸다. 일부 세입자들은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났다. 2019년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은 블랙스톤 CEO 스티븐 슈워츠먼에게 “주택의 금융화는 전 세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적절한 주거의 권리를 누리는 데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억만장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던 기간에 더욱 부자가 됐다. 아마존은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여파로 온라인 주문이 폭증하면서 2020년 상반기에만 1640억달러 규모의 판매고를 올렸다. 초당 1만달러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팬데믹 ‘덕분에’ 베조스는 전 세계 최초로 2000억달러를 넘는 재산을 가진 사람이 됐다. 반면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들은 적절한 보호장비도 없이 과로에 시달려야 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 세계 10대 부자들의 자산 합계는 7000억달러에서 1조5000억달러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전 세계 1억6000만명은 빈곤선 이하로 떨어졌다.
정부의 코로나19 지원책 집행 과정에 개입해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코로나19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뒤늦게 천문학적 규모의 지원책을 퍼부었는데,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코로나 지원 대출 관리 자문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에 맡겼다. “연준의 자금은 블랙록이 관리하는 펀드에 투입될 것이 확실했다. 어떤 펀드에 얼마를 투자할지는 블랙록이 직접 결정했다.”
저자는 다보스포럼 창립자 클라우스 슈바프가 2021년 제안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위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란 기업이 “경제와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관점에 서면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도 기업의 책무가 된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2020년 동료 CEO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경영에 기후변화를 반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블랙록은 화석연료 생산업체들에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 계획을 세우도록 요청하는 단체 ‘기후 변화 대응 100’에도 가입했다. 블랙록은 그러나 자사가 보유하고 있던 870억달러 규모의 석유기업들 주식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보스 억만장자 클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이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억만장자들의 탐욕에 일자리를 잃은 미국 백인 노동자들은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평생 민주당 지지자였던 한 철강 노동자는 “중국과 맞서겠다는 트럼프의 약속, 그리고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탈취하고 있다는 트럼프 선거운동의 핵심 신화에 솔깃해 트럼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저자는 “근본적인 경제적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서 억만장자들이 망치고 있는 시스템을 구해낼 방책으로 기본소득, 부유세, 협동조합 등을 제안한다. 그러나 더 강화된 버전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고 전 세계적으로 극우가 준동하는 현 상황에서 이 같은 제도 개혁을 추진할 정치적 동력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책과 삶] 노동자 삶 뭉개고 돈만 좇는 억만장자 ‘다보스맨’](https://img.khan.co.kr/news/2025/02/07/news-p.v1.20250207.c6be70b85e5e4384a29c5acf99b4d7b1_P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