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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함을 열면 있는 것

입력 2025.02.11 20:55

수정 2025.02.1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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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났음을 직감한 어느 날의 아침 나는 평소처럼 차를 마시다가 이번 여름을 보내며 수집했던 순간들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순간들. 기껏해야 1초에서 3초 정도로 이루어진 기억들이었다. 다음은 그때 적은 것 중 일부다.

바람에 작은 파도처럼 일렁이던 들판 / 시를 낭독한 뒤에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달콤한 정적 / 오랜만에 듣는 여름 풀벌레 소리에 한없이 위로를 받았던 것 / 처음 들어간 여름 바다에서 오랜만에 숨을 참고 잠수하자 뛰었던 심장. 호흡을 멈추고 수심이 깊어지니 천천히 가라앉던 심장 박동 소리. “그래 이거였지. 이 살아있는 느낌” /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현실의 한가운데에 멈춰 있던 때에 멀리서 날아온 존경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 우리가 만났던 것이 꿈이 아니고 내게도 있을지 모를 다른 삶의 가능성이 아주 헛되지 않다는 희망으로 느껴지던. / 나무 그림자의 경계를 밟으며 놀았던 어느 날. “내가 경계로 간 거면서 그렇게 징징댄 거구나. 지가 간 거면서!”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 풀잎과 그림자 안에서 살짝 축축해진 풀잎을 동시에 밟으며.

별 생각없이 적어내려갔는데 세 페이지 정도는 쓸 수 있었다. 가을이 되어 나의 책으로 북토크를 열었을 때 나는 행사에 온 분들에게 글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메모지를 나눠주며 여러분의 순간도 나눠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은 적어내려갔고 그 자리에서 함께 들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메모지를 고이 간직해 선물로 가지고 돌아왔다.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나는 이 메모를 종종 꺼내 읽었다. 내가 가진 일종의 보석함인데 선물로 받은 것이니 겨울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저녁 노을을 받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멀어지는 할머니의 뒷모습. 세상에서 제일 멋진 라이더 / 매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고양이 치치의 뒷모습을 보는 것 / 손님이 아무도 없는 2층 바닷가 식당에서 엄마와 소맥을 마시던 순간. 달큰하다~ / 영월 숙소에서 나무와 가까운 창 옆에 누워 가만히 새소리를 들었던 순간 /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강아지가 구석부터 등장하던 때 / 락페에서 좋아하는 밴드 라이브를 들으며 해파리처럼 춤을 췄던 순간 / 깨끗해질 수 없을 것 같아 괴로워하다가 깨끗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고 느끼는 찰나의 순간 / 눈을 감고 겨울을 기다리고 그려보는 것 / 호밀빵을 구워 땅콩버터를 바르는 순간 / 연인과 헤어지던 스타벅스에서 보이던, 바깥을 바쁘게 지나다니던 사람들 풍경. 나는 우는데… /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서 향수를 느꼈던 때 / 이사한 지 약 1년이 된 동네를 걷다가 ‘아, 너무 좋다 우리 동네!’라고 생각하던 순간. 벽돌집, 담장을 넘어온 나뭇가지에 달린 꽃과 잎들, 사랑스러운 우리집 나무 계단을 눈에 담으며. / 일에 몰입하다 떠난 다이빙 여행. 발리카삭으로 가던 배에서 누군가의 우와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보이던 돌고래 떼의 점프. / 아르바이트 끝나고 엉엉 울며 집에 갈 때. 사람이 지나가서 울지 않은 척한 순간. / 먹구름이 도시를 보자기로 싸듯 퍼져나가는데 그사이를 구멍으로 뚫은 것 같이 파란 하늘이 빼꼼히 보였던 순간.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구나. 희망도? …

나는 이 메모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적어두었다. ‘적히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구나. 기쁨도?’ 이 메모들을 읽다보면 여러 명의 사람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기쁨의 순간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어마어마한 현실의 압박 속에서도, 매일 끝없이 흘러가는 듯한 일상 속에서도 다들 어떤 순간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기도 한다.

뭉뚱그려지고 요약되어진 의미망 속의 서사가 아니라 일상의 틈을 벌리는 텅 빈 공간으로서의 순간에서 모든 것을 만난다면, 그때 당신은 어떤 모습이 될까.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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