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시민사회·진보정당 연대 단체인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 등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광장의 요구에 반하는 반도체특별법, 문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고 있다. 최경윤 기자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연구개발(R&D) 엔지니어로 일하는 한기박씨는 5~6년 전 함께 야근하던 선배가 화장실에 가던 중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씨는 119에 신고하거나 주변에 사고를 알리지 못했다. 한씨 자신도 과로에 시달려 정신이 없었다.
한씨는 “업무에 쫓기며 몽롱한 상태였던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님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며 “과로가 단순히 개인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넘어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력마저 마비시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반도체 R&D 직군을 ‘주 52시간’ 규제에서 제외시키는 내용을 담은 ‘반도체특별법’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업계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규탄에 나섰다. 노동·시민사회·진보정당 연대 단체인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은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광장의 요구에 반하는 반도체특별법, 문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고 의견을 나눴다.
14년차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 변희범씨는 “노동시간 유연화가 정식으로 허용된다면, 부서 분위기와 부서장의 평가를 무기로 한 무언의 압박으로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추가근로를 강요받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들은 반도체 R&D에 대한 노동시간 규제 예외가 타 직군·업종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에서 28년째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일하는 이수옥씨는 “회사는 몇몇 공장 제조팀의 이름을 ‘R&D센터 테스트연구부서’라고 바꿨고, 오퍼레이터에게 ‘연구원 지원·보조’라는 이름으로 근무를 시키고 있다”고 했다.
변씨는 “건설, 조선, 배터리, 소프트웨어 등 다른 업종에서도 예외 적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반도체특별법법은 단순히 한 업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노동자 보호의 근간을 이루는 법적 안전망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노동·시민사회·진보정당 연대 단체인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 등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광장의 요구에 반하는 반도체특별법, 문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고 있다. 김태욱 기자
전문가들도 과로의 위험을 경고했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은 “바짝 일하고 쉴 수 있다 하더라도, 바짝 일하는 동안의 과로와 그로 인한 건강 영향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연구 결과를 보면 주당 노동시간이 50시간 이상인 경우 스트레스, 우울, 자살사고 위험이 모두 2배 이상 높아진다”고 했다.
신하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변호사)은 “반도체특별법상 근로시간 규제 완화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도, 그 필요성이나 실효성이 입증되지 않은 과도한 조치”라며 “유해화학물질 노출, 교대제 근무 등 노동강도가 높은 반도체 산업 특성을 고려할 때 근로시간 규제 완화는 건강과 안전에 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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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R&D 직군을 ‘주 52시간’ 노동시간 규제에서 예외시키는 내용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이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습니다. 업계는 지금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라며, 장시간 집중 노동으로 R&D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이 R&D 성과를 오히려 저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도체 위기가 ‘삼성전자의 경영 실패로 인한 삼성전자의 위기’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반도체특별법 통과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52시간 예외 적용’에 반대 입장이었지만, 최근 이재명 대표가 ‘검토해볼 수 있다’고 밝힌 뒤로 명확한 찬·반을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들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