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압박에 휘둘리지 않고 국경 병력 배치로 ‘관세 유예’
이념 문제도 유연 ‘기업친화적’…‘강경 일관’ 트뤼도와 대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전쟁에서 선방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사진)이 ‘고도의 외교 기법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현지시간) 양국 대통령의 지난 3일 통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전언을 종합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4일부터 멕시코·캐나다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다가 3일 이들 국가 정상들과 통화한 뒤 관세 부과를 30일 유예했다.
약 45분간 진행된 통화에서 셰인바움 대통령은 무역, 마약, 이민 등 주요 쟁점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과 큰 의견 충돌이 나지 않는 선에서 논의를 이어갔다. WSJ는 1만 병력을 미·멕시코 국경에 배치하겠다는 셰인바움 행정부의 제안이 트럼프 대통령의 유예 결정을 이끌어낸 ‘최후의 일격’이라고 설명했다.
멕시코 병력은 미국 국경 인근에서 마약류인 펜타닐의 미국 유입을 막고, 불법 이민자들의 입국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양국이 무역 분야에서 협력했을 때의 이점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 당시 서명한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이 중국 등 다른 무역 블록과 경쟁하는 데 효율적인 도구가 됐다고 설득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 끝에 관세 적용을 얼마나 오래 보류하고 싶은지 물었다고 한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글쎄, 영원히 보류하자”고 답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나”라며 같은 내용을 되물어 압박했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한 달 미루자. 그 안에 성과 내겠다”며 유예기간을 먼저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통화를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셰인바움 대통령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성”이라며 마약과 불법 이민을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경에 병력을 배치한 셰인바움 행정부의 아이디어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임 대통령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고 WSJ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로페스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이 국경에 2만8000명가량의 병력을 파견하자 관세 위협을 철회했다.
셰인바움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마친 뒤 미국에 보복 관세를 적용할 수 있다고 발표한 점은 강경 대응 방침부터 밝힌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달랐던 점이라고 WSJ는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궁지에 바로 몰기보단 사전 협의를 통해 그에게 퇴로를 마련해줬다는 것이다.
셰인바움 행정부는 멕시코 기업 임원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 관료들과 간접 소통하고 있다. 알타그라시아 고메스 대통령 경제 고문과 기업 임원들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날인 지난달 20일 워싱턴을 찾아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와 모임을 했다.
WSJ는 셰인바움 대통령이 현지 기업계와 외국 투자자들에게 이념 문제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며 그를 ‘실용주의자’로 평가했다. 집권당 좌파 국가재생운동의 방향성과는 다르게 기업친화적 접근법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CNN도 ‘화내는 사람은 진다’는 멕시코 속담을 인용해 셰인바움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합의를 잘 끌어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불법 이민자를 태운 미국 군용기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욕했다가 ‘고율 관세 부과’ 협박에 꼬리를 내린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과 비교했다.
미국·멕시코 관계 전문가인 덩컨 우드 전 윌슨센터 부소장은 셰인바움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 마주할 과제에 대해 웬만한 사람들보다 더 잘 대처할 준비가 돼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수사(레토릭)에 휘말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게임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엘리트를 비롯해 멕시코의 각 사회계층과 광범위하게 협의하면서 이들의 우려를 듣고 통찰을 배우고 있다고 분석했다.